- [성경본문] 전도서4:7-1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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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복(福)된 인생의 장애물들
전도자는 오늘 4장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불의한 학대요, 둘째, 이웃의 시기요, 셋째는 세상 명성의 유한성이라고 했습니다.
해 아래 세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권력있는 자들이 학대하지만 이에 맞서지 못한 채 당하고 눈물만 흘리는 불행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불공평한 세상의 모습이죠. 권력을 칼처럼 휘두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에 맞서지 못하고 슬퍼하지만, 그 누구도 위로하는 자가 없다고 했어요. 이런 모습은 과거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법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문제는 권세있는 자들이 자신의 편에 유리하게 법을 해석하고, 여의치 않으면 법을 새로 만들어 강행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사람의 영혼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는 죄성은, 남이야 어떻든지 간에, 자신의 안위와 쾌락과 편리만을 중요시 여겨 행합니다. 쌍방간에 합의가 되면 다행이에요. 그러나 합의가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죽이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결국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에요.
이 죄악된 모습을 설명하면서 “해 아래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했어요. “해 아래 행하는 것” 이 표현은 전도서에 스물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강조점이에요. 그 뜻이 세상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행하는 모습이 헛되고, 그 모습이 추악하며, 그러기에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묵상하는 중에 그렇다면 “해 위에서 행하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해 아래에서 행한다 함은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 없는 인간이에요. 소위 인본주의입니다. 반면에 해 위에서 행하는 것은 그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신본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전도자는 세상을 보며 “헛되고 헛되도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뜻은 역으로 해 위인 하늘 위를 볼 때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보람있고 의미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서 전체의 대 주제인 것이에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약한 자를 두렵게 하는 힘이지만, 하늘의 권세는 누구든지 살리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세는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권세는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악한 문화를 개혁합니다. 이는 오직 악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그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시작되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세상의 모습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요. 그 모습은 주가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며 이루어가야 할 나라입니다. .
두 번째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웃의 시기라고 했어요.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4:4) 시기와 질투라고 했어요. 우리 옛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오죽하면 그런 속담이 나왔겠습니까?
해 아래 그와 같은 모습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죄를 도말하신 예수 안에 새롭게 거듭나야 이 시기와 질투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수를 믿으므로 변화된 심령에는, 시기와 질투 대신 무엇이 생겨나는가? 사랑과 협력이 생겨납니다.
9절 이하 12절까지의 내용이 그것이에요. 사랑과 협력에 관한 것입니다. 그 모습은 해 아래가 아니라 하늘 위의 모습이에요. 그럴 때 불행은 물러가고 행복이 임하며, 세상의 삶은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라, 복되고 복된 것이 될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4:9~10)
넘어지면 곁에 있는 동무가 붙들어 일으킨다고 했어요. 시기와 질투의 반대의 모습이에요. 그러므로 좋은 상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 믿는 자의 모습은 해 아래의 행하는 모습이 아니라, 해 위의 행하는 모습, 즉 하늘 위 천국백성의 모습으로 살게 되니 복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말씀 11절과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1~12)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반목과 불신이 아니라, 사랑과 협력을 이루어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세상에서 추구하는 명성은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모두인 것처럼 사람들은 여기고, 추구해요. 기대합니다. 그러나 한 세대가 가고 나면 부서지고 사라집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센 파도로 밀려오지만, 바위에 부딪히고 포말로 사라지고 마는 모습이에요.
13절과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전4:13~14) 굉장히 소망을 주는 말씀이에요. 한 지혜로운 젊은이가 비록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또한 어떤 억울한 누명으로 비록 감옥에 갇혀있을지라도 그 운명을 깨뜨리고 왕이 되었다. 대단한 반전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반전에 매료되고 역전에 환호합니다.
집권은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합니다. 치명적인 매력에 전생애를 바쳐가며 그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행히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거꾸로 권력의 자리로 인해 인생 망치는 자도 있습니다.
누구나 나는 잘할 수 있다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권좌에 앉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대를 가진 백성들은 그 권세자를 응원하고 따르고 행복을 기대합니다. 오늘 말씀 14절의 내용이에요.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전4:15)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백성들의 기대충만입니다.
그러나 권력을 행하는 자리는 참으로 엄청난 책임이 수반되는 자리에요. 소인배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는 자리요, 자신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서도 아니되는 자리요, 전체의 행복이라는 큰 그림을 이루어가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결코 만만치 않아요.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의 경우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일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마음에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피부의 색깔로 고통당하는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염원이었습니다. 반대에 부딪혀 전쟁을 불사하면서 새 역사를 이루었지만, 전쟁터에서 생명이 죽어갈 적마다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4년간 통치하는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의 얼굴은 10년이 늙은 모습이 되었다고 했어요. 사진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65년 4월 14일에 암살당하고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미국 사회는 세계 문명과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하는 새 역사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 말씀 15절 초반부에 “해 아래에서” 행하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해 위에서 행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권력과 권세는 그저 헛되이 사라질 뿐이에요. 1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4:16)
나찌독일의 수장인 아돌프 히틀러가 그 모습이며, 북한의 김일성과 이어지는 권력자들,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혜성처럼 반짝이며 나타났다가, 백성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남긴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권력자들이 모습이 그러한 모습일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습이 아니라, 해 위에서 행하는 모습, 하늘나라 천국 백성의 모습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삶으로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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