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있으라 하신 곳에서 충성하며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바라고 바라던 성벽 재건을 완수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감당해야 했던 그 큰 프로젝트에 친히 함께하신 하나님, 지키시고 보호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므로 그들의 믿음도 강건해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아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에 누가 거주하며 그 안에 있는 성전을 지키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성읍을 방어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에 산다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졌습니다.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에요.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외세의 침략을 지켜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센터라고 하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주변 국가가 쳐들어오면 제일 먼저 타겟이 되는 성읍이었기 때문에 안전에 관한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함과 용기가 있는 자들이 예루살렘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의 권한으로 새 예루살렘 성읍에 거할 자들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여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그 사람들은 포로 생활 이전에도 예루살렘의 거주민이었던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층에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각 계파의 지도자들로 구성하고 국방을 위한 병사들도 이 두 지파에서 차출하여 세웠습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각 성에서 십분의 일의 백성들을 차출하여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십일조의 정신이 적용되었어요.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백성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주민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원하는 백성들이 거주하며 살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얻기 보다는 영적인 축복을 더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평강을 구하는 자들에게 형통케 하시고 복을 내리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 주민이 형성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여러 가지 부담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을 잘 지키고 보존하며 부흥되도록 솔선수범하여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이처럼 협력 속에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어제도 나누었습니다만 그들의 깊어진 믿음 때문이었어요.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세상 속에 위치한 교회가 어떻게 그 위치를 점하고, 거룩을 유지하고 진리를 수호해야 할지, 각자 성도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생각하게 됩니다. 산 위의 동네로서 숨을 수 없는 존재로 그 산 위에서 비추는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며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은사와 재능에 따라 주요 역할들이 주어졌습니다. 19절에는 도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소개됩니다. 그들은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교회의 모습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수호하며, 이단의 침략과 세속적인 풍조로부터 방어해야 할 책임을 가진 교회의 중직자들입니다.
22절 이하에는 노래하는 자들이 소개됩니다.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들입니다. 부르는 자나 듣는 자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건을 유지하는 일에 찬송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10절 이하에는 성전에서 수종드는 사명을 감당하는 제사장들과 돕는 자들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보자로서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경건하고 복된 삶으로 살아가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전하며 권면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21절에는 느디님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오벨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언덕 남쪽 지역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었어요. 그들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어 같이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종과 같이 봉사하는 자들이 되었어요.
이 모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선교요 전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같이 처음부터 선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미칩니다. 전도를 받고 은혜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아, 교회에서 함께 주를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하는 일에 동참하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성벽이 새롭게 재건되고 그곳에 거할 주민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면서 우리가 보고 배우는 것은,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느곳 어느부서 어떤 일로 섬기든지 간에 다 중요해요. 분명한 역할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충성되이 섬겨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20절에 보니 유다 모든 성읍으로 흩어져 사명 감당하는 자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자기 기업에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레위 사람들로 보냄을 받아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국내 교회 개척자이든 해외 선교사님들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그곳에서 영혼 구원을 위하여, 그들의 믿음이 자라나고, 주의 제자들로 세우는 일에 충성되이 잘 감당해야 하겠지요. 정말 그러기를 바라며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영역에서든지 이처럼 맡겨주신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이 땅에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나라는 든든히 서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어려움 속에서도 말없이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마침내 귀한 열매를 맺은 한 선교사님 얘기를 전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칼 루드빅 라이헬트(1877∼1952) 선교사님은 노르웨이 분으로 홍콩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929년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계획은 특별하여 절에서 살아가는 불교 수도승을 선교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이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매일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불교에 관한 지식을 배웠습니다. 승려들에게 불교철학과 문학을 배우고 또 연구했어요.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레 승려와 불교 신자들과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이후 그는 아예 머리를 깎고 이곳 타오퐁산의 절로 들어가 불교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교 승들에게 전도가 쉬운가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도열매를 맺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사찰 생활을 하니, 본국 선교본부로부터 선교사 자격박탈 위기까지 놓이게 되었습니다. 세 번이나 소환 명령을 받았어요. 하지만 이 선교사님은 “나는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기다려 주세요.” 간절한 요청을 보내 선교사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본국과의 연락마저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이 주께 보냄받은 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홍콩 복음화’라는 분명한 목표를 잃지 않고 꾸준히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별의별 비방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열매를 맺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를 전도하고 세례를 주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어요.
주어진 자리에서, 주께서 주신 은혜와 능력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전하니 한 영혼 두 영혼 주님 앞에 나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역 23년 동안, 542명의 승려와 281명의 지식인들, 40명의 도교승이 타오퐁산에서 그가 전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 수련생 중에 56명이 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 8을 활용한 팔각정 모양의 타오퐁산 교회를 건축해 홍콩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 루터신학교와 기독교연구소, 세계교회센터, 수양관 등을 건립하여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자들의 순종과 섬김과 충성을 통해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 이후 이루어지는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우리 산돌중앙교회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과 같이 산 위에 동네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산 위에서 만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며 병든 세상을 치유하며, 길을 잃은 자들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일에 쓰임 받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이 새벽에도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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