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6:11-18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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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 [성경본문] 고린도후서7: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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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聖殿)
우리는 어제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 전파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될 때 진리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칼로 세상을 정복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했다는 나폴레옹 자신의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내가 가진 권위로 직책으로 또는 힘으로 강압적으로 복음을 주지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적용 부분에서는, 전도도, 사역도, 목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성품, 또는 인품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의 영성이요, 사도바울의 영성이라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은 영성은 내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므로 성령 충만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우들이 그렇게 사랑이 많은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속 좁은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 안에 파당을 만들고, 바울의 반대편에 서서 바울의 권면을 거부하던 자들을 향하여 권면합니다.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1절부터 13절 말씀까지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 뜻이 이러합니다. “속 좁은 너희의 마음을 넓히라 내가 그렇게까지 고난을 당하면서도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너희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한 것처럼, 너희도 그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너희의 마음을 넓히라” 사도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 사도바울은 성품적으로 그 마음이 넓지 못한 고린도 교회 교우들의 그 마음의 근본적 요인이 무엇인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결국 당시 고린도 도시의 영적, 문화적 영향 때문임을 지적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과 상치되는 고린도 도시의 영적 상태는 우상숭배에서 나타납니다.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도시는 이 여신을 모신 신전을 중심으로 공공적으로 음행이 행해졌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리스 문명을 이룬 세상 적 문화인 철학이 있었습니다. 이 철학사상은 인본주의에 근거합니다. “사람은 이미 신적 지혜를 물려 받았다. 그러니 이제는 신 없이도 이 양심과 지혜로 이 땅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대명제 하에 도시는 영적으로는 타락하고, 사상적으로는 철학이 발전하고, 이를 잘 설명하기 위한 수사학이 발전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인기가 좋았어요. 광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들의 화려한 언변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족했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세상 적 사상과 풍조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도 있는 거에요. 그들이 직, 간접적으로 교회 안에 부정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거에요. 그러면 올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까? 14절 15절 말씀이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6:14~15)
이 말씀에서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라는 말씀은 “아예 상종하지 말라” 그런 말씀이 아니고 “사역을 같이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아시는 대로 멍에는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에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그들의 지적, 정신적, 영적 영향을 받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를 두 가지 대조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한편은 빛으로, 또 다른 편은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로 표현하였습니다. ‘벨리알’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악한 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 별명입니다.
이 부분은 적용에 있어서 주의를 요하는 부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린도 도시에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은 없어요. 그러나 대신 다른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사를 할 때나 큰일을 치를 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소위 ‘길일’을 찾고 ‘택일’을 합니다. 천신(하늘신)을 믿는가 하면 지신(땅신)을 믿어요.
우리 믿음의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바로 하늘나라 하나님 품에 가는 것을 믿지만 그들은 여전히 며칠 동안은 영혼이 장례식장 주변을 떠돌고 있고, 그래서 장례를 잘 지내야 갈 곳으로 떠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 한을 풀지 못하면 갈 곳으로 가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구천에 떠돈다” 그래요. 구천이 뭐에요?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누어 이르던 말이 구천입니다. 흔히 이승과 저승 사이를 구천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기일이 되어 제사상을 마련하면 조상신이 다시금 돌아와서 생일상도 받고, 제사상도 받고, 복을 주고 다시금 계신 곳으로 돌아가신다고 믿어요. 기독교 신앙과 다릅니다. 많이 다릅니다.
선한 일을 하는 목적도 달라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한 일을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그런데 같이 선한 일을 베풀어도 다른 종교인에게는 그 의도가 달라요.
산스크리트어로는 ‘꺼르마’ 라고 말을 하는데 이는 ‘업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왜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적선을 해야 하는가? 감사해서? 아닙니다. 열반에 가기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합니다.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해요. 그러니까 공력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억지로라도 선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다음에 다시금 이 땅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다시 윤회하여 태어난다면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려고, 버러지가 아니고 짐승이 아니고, 귀한 집안의 자녀로 태어나려고, 적선을 하고 보시를 하고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멍에를 멜 수가 없어요. 목적이 달라요. 뜻이 달라요. 그러한 마음과 의도로 사역을 함께 한다면 마음이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주장하기를 “종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선행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은 함께 하자. 어려운 사람을 돕자. 그러므로 멍에를 함께 메자.” 행동은 비슷한데 동기가 달라요. 목적도 달라요. 물론 죽어가는 사람 살리고 보자 구호사역과 같은 일은 함께 동참하겠지만, 아예 처음부터 계획을 함께 짜고 함께 추진을 하는 모습은 자칫 신앙에 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그러므로 14절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그 다음에 16절에 사도바울은 이 모습을 성전에 관한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중략)”(고후6:16)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한 자는 그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우리가 성전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성전의 기능’이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인데요. 성령이 믿는 자의 심령에 거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약시대 성전에서 이루어진 일이 우리 심령 가운데 벌어집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용서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아멘!
이것이 16절 중반부터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믿는 자의 심령 안에 내주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성전은 글자 그대로 거룩할 성聖자에 큰 집 전殿자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거룩한 전이에요.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 되어야 하는데, 거기에 우상이 놓여져 있으면 안되겠지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일치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깁니다. 사람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진리로 믿고 따릅니다.
고린도 도시에 성적으로 비윤리적인 문화를 형성한 아프로디테와 같은 여신을 결코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점을 보고, 운수를 보고, 기일을 보고, 택일을 잡는 영적인 혼합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고린도 문화, 즉 사람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본주의에도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몸도 성전과 같이 정결해야 합니다. 행여나 주의 마음을 아프게 한 언행심사가 있다면,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깨끗한 심령이 되어 그 청결한 심령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활짝 핍니다. 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됩니다.
결론으로 주시는 7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이 새벽에도 기도할 때에 거룩함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 오늘도 어두운 세상을 능히 이겨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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