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12-2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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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에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도와 교역자의 관계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사랑과 아픔 그리고 슬픔을 읽습니다. 사랑이란 자신이 설립한 고린도 교회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이요, 아픔이란 그처럼 권면을 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라보는 것이요, 슬픔이란 자신의 그 수고와 노력이 거꾸로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비난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이라면 누구나 심하게 앓고 지나가는 대단한 홍역 치레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죄 많은 인생을 사랑하십니다. 진정으로 사랑하셔서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하셨어요. 매일 매일의 삶이 병든 자, 배고픈 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율법의 올무에 얽매인 자, 소외당하는 자, 마음 상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어요. 기적을 베푸는 현장에는 언제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역의 기초는 죄인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변하지 않았어요. 율법과 전통의 틀을 고수하면서 하던 대로, 해왔던 대로, 고집하며 천국 복음에 대해서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픔이었어요. 그러므로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구나, 겉은 그럴듯하나 속에서는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일었습니다.
슬픔은 이것입니다. 변하기는커녕, 반대로 적이 되어, 예수를 향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낙인찍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같으면 속 터지고 화가 나서 대적을 할 텐데...., 예수님의 마음에는 노여움이 아닌 슬픔이 입니다. 예수님은 그 죄를 안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 새벽에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자들입니다.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사랑받는 거에요. 왜냐하면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행여나 우리의 마음이, 삶이, 변화되지 않으므로, 주님의 마음에 아픔이나 슬픔을 주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여기에 있으니, 들으시면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고, 받아들이셨으면 순종하셔서 변화된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고 거기에서 겨울을 유하기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약속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5절 6절 7절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방문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바울의 모습에 대해 바울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간관계는 언제고 쉽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바울의 반대파들은 이 일을 빌미삼아 바울을 “육체의 지혜(12절)로 행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경솔히 여기고(17절) 거짓말하며 경솔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입장이 12절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1:12)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간다고 하고 가지 못한 것은 육체의 지혜로 해서가 아니고, 경솔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울의 자기 입장 설명은 17절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후1:17)
여기에서 “예 예 하고 아니라 아니라” 하는 표현은 이럴 때는 이렇게, 저절 때는 저렇게 상황에 따라 줏대 없이 임의로 상황을 바꾸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간다고 하고 가지 못한 것은 “그렇게 임의로 가볍게 처신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에요.
육체의 지혜란 자신의 이익과 욕심에 따라 세상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육체의 지혜를 단호히 거부했다고 했어요.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천명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통제를 받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고린도 교회 안에 어떤 성도들은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네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인 선교사 중에 한 분인 이 선교사님은 고도 3000m 높이의 동부 산악지대. 그는 거기서 초등학교 운영과 교회 개척 사역, 순회 전도사역을 펼쳤습니다. 여섯살난 쌍둥이 남매와 돌 지난 아들을 사모에게 맡기고 때로는 한 달씩 집을 비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주 열심히 사역을 감당했어요.
선교사 3년 차인 1997년 1월 초, 고산지대의 추운 날씨 때문에 아이들의 방에 석유난로를 켜놓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쌍둥이 남매는 가스에 질식돼 숨을 거뒀습니다. 그날은 한국 단기 선교팀이 방문하는 날이어서 카트만두에 손님들 모시러 온 그 밤에, 석유 난로를 끄고 자야 하는데 그냥 잠들어 버린 것이었어요. 그 아이들을 돌보는 자매가 끄는 것을 잊어버린 거에요. 네팔 산촌 마을 교회 옆 양지바른 곳에 남매를 묻은 이 선교사와 사모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왔어요. 그 마을에 사고로 죽은 아이에 대해서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였다”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엉뚱한 소문이 돈 것입니다. 네팔 산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지해서 돈을 받고 딸들을 인도로 파는 모습은 있어요. 그런데 죽였다니 말도 안되는 얘기인데, 그런 소문이 사실처럼 퍼졌습니다. 마을주민들이 이 일로 선교사님을 경찰에 고발을 했어요.
급기야는 네팔 경찰과 법원의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네팔 정부로부터 추방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자녀들의 무덤이 거기에 있는데 그와 같은 엉뚱한 누명과 고발로 네팔에서 추방당하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에요. 세상 말로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추방을 당합니다. 오해와 오해로 인한 누명이 결국 이런 뼈아픈 결과를 가져왔는데요. 설립한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니 힌두교 신자들인 그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학교사역을 멈추게 하고자 그런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생명을 살리고, 기독교 학교 교육이 아이들의 미래에 소망을 주는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이들 부부는 네팔로 들어가지 못하자 방글라데시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그 어려운 역경을 겪고 난 후에 이중환 선교사 부부는 지금까지 방글라데시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현재는 현지인 목회자 훈련프로그램을 이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역자는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살 때 사랑으로 하지만 오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일로 아픔이 있고 그 아픔으로 슬픔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그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은 여전히 고린도교회에 바로 갈 수 없었는가? 아무리 다른 지역의 전도사역이 바쁘고 힘들어도 갈려면 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사도 바울은 그러한 영성의 소유자였지 않았는가? 그 오해를 풀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3절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3~24)
“내가 가지 않는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후1:23~24)
무슨 말씀인가요? 먼저 써 보낸 고린도 전서를 통해 사도바울은 여러 가지 권면을 하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변화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분파와 파벌을 그치고, 그 도시의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아 자행되는 음행을 그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차별이 없어져야 하고....., 열 가지나 되는 잘못된 모습들 변화되기를 원했어요.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징계가 시작됩니다. 심하면 출교, 즉 교회에서 쫓겨날 자들도 있어요. 교회는 어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바라는 바는 그것이었어요.
“어서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라 교회의 온전한 모습으로 바르게 서라. 그러기를 바라며 나는 지금도 참고 기다리고 있다. 어서 속히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갈 때는 아무런 꾸지람이나, 책망 없이 기쁘게 그들을 만나기를 바라는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자들이었기에 질책하기보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설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역자라면 바울의 이 사려 깊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라면 사역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교회, 이 모습이 주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또한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모습의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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