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전서7:17-2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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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부르심을 받은 그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사도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인 신분이 차이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만인평등 사상이 강조되고 있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오늘날 21세기 초에 이러한 문제는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립니다. 한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신분의 차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교회 안에서는 교우들 간에 작용하고 있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가문이 어떠한가? 배운 집안인가? 또는 출생지가 어디인가? 명문 학교 출신인가?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 또는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 사업주인가? 또는 회사 안에서 임원인가? 아니면 말단 사원인가? 자녀들은 잘된 집안인가? 정치적 성향은 어떠한가? 진보주의자 편인가? 아니면 보수주의자 편인가? 마지막 결론으로는 그래서 복을 많이 받는 자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자인가? 여하튼 사람들은 자신의 틀과 기준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고린도 도시, 고린도 교회 교우들 중에는 서로 다른 점의 가장 큰 기준은 두 가지였어요. 유대인인냐? 아니면 이방인이냐? 하는 점이었어요. 할례를 받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또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 이방인 중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리스인이 아니면 다 야만인이다 라고 하는 자부심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제국은 그리스의 발달된 사상과 문명을 기초로 세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도시는 그리스인들의 자존심이 넘치는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들은 오히려 이방인이요, 나라 잃은 나그네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자존감이 약한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처럼 행동하기를 원했고, 그들 중에 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목욕탕 문화가 발전했고, 그리고 운동경기가 발전했는데, 이들은 목욕할 때도 그렇고 또 운동경기를 할 때는 옷을 벗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에요. 이 할례 받은 것이 숨길 수 없는 표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리스인들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유대인 중에는 할례받는 표를 없애고자 하는 성형수술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은 한국에 한국민으로 살아가시기 때문에 이런 인종적 또는 시민권의 차이점에 대해서 잘 모르실 거예요. 그러나 의외로 세상에는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사람 중에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사람들 많습니다. 영주권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나라, 군사력이 월등하고, 사회보장제도가 훌륭한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고 싶은 거지요. 혜택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즈도 먹게 되고, 햄버거도 먹게 되고, 말도 미국 사람처럼 혀를 돌리며 영어를 구사하지만, 정작 집에서는 김치 없이 못 살아요. 태생이 한국인임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런 모습 보실거에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일하러 들어와서 한국 시민권을 취득하고자 하는 외국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피부 색깔이 다른데 한국 시민이 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그들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려고 많이 노력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 도시에서는 반대의 일도 벌어졌어요. 이방인의 땅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모인 유대인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회당에 들어올 자격을 세웠는데,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회원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스인이 아닌 어떤 변방에서 온 사람도 그렇고, 자존심 강한 그리스인이어도 그렇고, 할례를 받아야만 택함받은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울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18절과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8~19)
구원받음에 있어서 시민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름받은 그 자리에서, 한국인이로서, 미국인이로서, 또는 네팔인으로서, 방글라데시 인으로서, 어떤 나라에 시민으로 태어났든지 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이 또 그 말씀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
성도 여러분, 행여나 교회 안에서 그럴 리도 없겠습니다마는 우리 교회에도 앞으로 외국인들, 다문화가정 식구들이 더 오면 더 오지 덜 오지 않을 텐데, 그들이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진실함으로 공평하게 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예수 안에서 누구나 동등한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상전과 종의 문제였어요. 예수를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는데, 여전히 종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종의 신분으로 대우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요. 하나님은 만인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영혼은 싸고, 부유한 자의 영혼은 더 비싸고 그런거 아니지 않겠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상전들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여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차별이 없어요. 남녀노소, 빈부격차, 많이 배운자, 덜 배운자 상관이 없이, 교회 안에서는 모든 신분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의 사슬이 끊어지고 자유함을 입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천국에서도 그럴 것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24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4) 종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종의 모습으로 상전이면 상전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서 자유함을 입으라. 그런데, “이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내 신분을 벗어버려야겠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양 사회에서 종의 개념은 과거 우리나라나 동양에서처럼 출신성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노예나 종은 전쟁에서 져서 포로가 되던지, 또는 빚을 많이 져서 빚을 갚기 위해 종이 되기고 했어요. 빚 다 갚으면 풀려나는 거예요. 먹고 살기 힘들어 부와 권세가 있는 집에 가면 최소한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으니 스스로 종이 되기도 했어요. 지혜로운 종은 집을 관리하는 집사가 되기도 하고, 이어 주인이 세상을 떠날 때, 재산을 물려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공평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종의 임무를 저버리거나 대충하려고 하는 모습은 옳치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일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함을 입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요. 그 옭아매는 굴레가 사람이 아니라, 심령의 주, 영혼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니,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줄로 알고 또 믿어야 하겠습니다. 22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7:22)
그래서 부자도 하나님의 종이요, 가난한 자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내가 하는 일도, 그 일이 어쩌면 하챦아 보일지라도, 또는 거창해 보일지 몰라도, 그 일을 통해 사람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마찬가지로 나도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일로, 각자 부르심의 그 자리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 이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지던 때에 전북 김제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용화마을의 양반지주이자 조덕삼이란 분이 있었어요. 조덕삼은 말들이 거하게 하는 마방을 운영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마방에 선교사가 묵게 되었어요. 그에게 복음을 듣고,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처소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금산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조덕삼은 집안 식구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중에는 마부 이자익(1879-1957)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후 예수에게 붙들린 조덕삼과 이자익은 힘을 모아 금산교회를 세우는데 진력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두 사람은 1907년에 함께 금산교회의 영수로 임명되었고, 금산교회는 그해에 독노회 전라대리회의 허락을 얻어 장로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어요.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었습니다.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어요.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이 없고, 그 자체로 함께 어울려 사는 신앙의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했으며, 1915년에는 금산교회 2대 담임목사로 청빙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이자익 목사는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큰 인물이 되었어요. 비천한 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참된 믿음의 후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은 위대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기 마련입니다. 조덕삼도 이후, 장로님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조영호도 장로가 되었어요. 그리고 손자 조세형이란 분은 신앙인으로써 국회의원을 지내고 또 주일대사를 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모두는 이 모습과 같이 성도 간에 어떠한 차이로 인해, 사람을 대하거나 선입견을 품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어떠한 사람에게 속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다 함께 주님께 속한 자로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영혼의 자유함을 가지고 아름다운 신앙 생활하시는 복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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