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욥기30:9-2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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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11.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12. 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13.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14.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15.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16.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18. 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
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22.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고난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
과거에 그처럼 행복한 인생으로 살았던 욥의 현재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고난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30장은 견디기 힘든 그의 아픔과 슬픔을 주욱 열거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가 당하고 있는 수욕과 비참한 처지를 술회하고 있어요. 욥기 전체를 통하여 이처럼 곤고하고 애처로운 욥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에 저나 여러분이 이러한 상태에 있다면 “어떠한 마음을 가질까? 견뎌내기는 할 것인가? 과연 믿음이 유지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러한 고난이 와야 하는지, 어떠한 하나님의 싸인도 없습니다. 그 계획과 뜻을 알려주시면 좋겠는데 침묵 속에 일관하십니다. 19절과 20절에 욥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의 아픔과 고뇌가 절절히 배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욥30:19~20)
욥은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22절과 23절에 욥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욥30:22~23)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이는 완전 절망의 고백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으니,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합니다. 소망이 없어요.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죽는 것 뿐이구나!” 그것이 욥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대홍수의 때 노아는 40일 주야로 내리는 폭우 속에서 방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 방주 속에 갇혀 있는 노아를 한번 상상 해 보세요. 3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주, 그 안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함께 있는데 출렁이는 물결로 인해 방주는 흔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방주 자체의 이음새들로부터 끼익~ 끼익~! 하는 굉음이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안은 많이 어두웠을 것이며, 짐승들의 소리로 시끄러웠을 것이며, 통풍은 얼마나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날이 40일로 끝난 것이 아니었어요. 비가 그친 다음에도 나올 수가 없었어요. 세상은 온통 물밖에 없었어요. 그러므로 방주에서의 날이 무려 375일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 1년 10일 동안 하나님은 출현하지 않으십니다. 노아에게 어떤 싸인도 주시지 않으세요. 소통이 없어요. 불통입니다. 노아가 알고 있는 것은 한가지였어요. “세상을 물로 심판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그런데 그날이 그렇게 오래되어질 줄 알았을까요? 1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미래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 중에 어려운 부분은 언제고 고난의 때를 통과할 때입니다. 생각지 않았던 육신의 질병이 찾아옵니다.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면 나 한 사람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어려움에 처합니다. 집안에서는 웃음이 사라집니다. 감당해야 할 가장의 책임, 어머니로서의 책임, 일터에서의 책임,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자로서의 책임,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깜깜한 고난의 터널은 끝이 없는 것 같아서, 언제 밝은 빛을 볼 수 있을 것인지, 그때를 알지 못해, 답답한 심정이 잠을 못 이루게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 계신 것인지? 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인지? 정말 살아계시기는 하신 것인지? 의심의 바람이 불어 마음에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바로 노아와 같고 오늘 성경의 인물 욥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나 욥이나 그 일 년간의 시간 속에 나타나지 아니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관심도 없이 어디 먼 곳에 가셔서 다른 일 하고 계셨을까요?
연관하여 창세기 8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 들었고....”
“기억하사” 라고 했습니다. 원어로는 ‘자카르’ 이는 ‘마음에 담고 기억하고 계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생명체들이 1년 10일을 지내는 그 어려운 시간 동안 하나님은 한순간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계시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야 해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어려움을 만나고, 무거운 짐으로, 그 인생이 곤고할 때,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그 계획하신 날이 올 때까지, 감당해야 할 수고, 고난, 고통의 날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고 계시며, 여하튼 견디게 하시고 마침내 해피엔딩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왜 고난을 주십니까? 사랑하는 자녀에게, 열심히 주를 믿고 따르는 신실한 자에게, 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까? 고난이 주의 백성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인생이 고난 없이는 알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고난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두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욥이 고난 중에 외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진흙 속에 던지시고, 티끌과 재 같이 몰락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시고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게 하십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평안하고 등따습고 배부르면 세상에 취하고 맙니다. 그래도 좀 신앙이 있으면 두 주인을 섬깁니다. 한쪽은 세상, 한쪽은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 “아이구~! 우리 하나님은 너무 이기적이시네~! 모든 사랑을 다 받으려고 하시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주께서 창조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진정한 행복의 원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 영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러한 자를 하나님은 복 주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요, 복된 인생의 수칙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람이 등따습고, 배부르고, 평안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된 나와의 관계를 잊고 삽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이 닥쳐오면, 그것도 아주 혹독한 시련이 닥쳐오면, 더 이상 내 힘과 능력으로 설 수 없게 되면, 비로소 알고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의지할 분, 하나님 밖에 없구나! 세상이 아니었구나! 나의 주인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요, 내가 아니었구나!”
오늘 욥이 고백합니다.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욥30:24) 넘어질 때, 그리고 재앙을 당할 때 사람은 비로소 전능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내 영혼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도움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만이 알고 깨닫는 것, 둘째, 유한한 인생임을 철저히 알게 하십니다.
“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구나!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날이 언제인지 장담하고 사는 것이 아니구나!” 욥이 깨닫습니다.
잘 살 때, 행복할 때, 모든 것이 형통할 때, 권세가 있고 물질이 풍요로울 때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죽음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내 사전에 죽음이란 단어는 없다!” 나폴레옹은 말했다고 하지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래서 그렇게 패배자가 되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당하고 조롱당하다가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쓸쓸히 죽어갔습니까?
30장 23절에 욥이 고백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욥30:23)
욥이 고난당하기 전에, 이처럼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했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유하고 형통하며 부러울 것이 없으면 그런 상황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싫어서라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애착만이 있을 것입니다. 욥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을 묵상했지만 욥이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은 낯설고, 싫고, 슬프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극심한 육신의 고난과 고통이 임하게 되니 비로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유한한 인생이구나! 내게도 죽음이 올 수 있겠구나!” 죽음이 멀지 않은 곳, 내 삶에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인생을 진지하게 삽니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한날 한날이 소중합니다. 주께서 나를 이 땅에 생명으로 보내실 때 그 목적, 사명을 잘 이루어가고 있는가? 주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가정에서는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사명, 세상에서는 일터에서, 사업장에서 일꾼으로서의 사명, 그리고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자의 사명, 잘 이루어가고 있는가?
이와 같은 자의 인생은 잘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이미 그런 인생의 여정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도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 언젠가 떠나게 될 세상,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 영생복락을 누리는 곳, 미리 잘 알고 계시므로, 고통과 고난이 필요 없는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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