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욥기25: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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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제공: 대한성서공회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오늘 욥기 25장은 여섯 절로 이루어져 있어요. 욥기서 중에 제일 짧은 장입니다. 그 내용은 1절에 보니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한 것인데, 그 주제가 ‘하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빌닷이 이렇게 왜 느닷없이 욥에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욥이 계속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니 빌닷이 볼 때는 “인생이란 어느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욥도 죄 없다 말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이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에 비하여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크고 높고 깊고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신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빌닷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시니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25:4) 이 말은 빌닷이 욥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욥아, 네가 계속해서 너의 무죄를 주장하는데, 세상에 깨끗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네가 지금 작금에 겪는 이 고난과 고통은 무엇이냐? 네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보응하는 것 아니시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죄 없다 말할 수 없다.” 빌닷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뜻은 깊고 심오하니 사람이 다 알 수가 없다.” 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욥 자신은 하나님 면전에서 그렇게 고난 당해 마땅 할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난과 고통이 임하였으니, 빌닷과 그의 친구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과 두 친구는 그들이 알고 이해한 하나님이 다라고 여기고 있어요.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내가 경험한 것이 다에요. 내가 공부한 것이 다에요. 그러므로 판단의 기준과 잣대가 자신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상태를 “고착화 되었다.” 또는 “화석화 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마음에는 도무지 새로운 이론이 들어갈 수가 없고, 변화되는 세상과 문화는 용납이 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말로 꽉 막힌 사람, 소위 ‘꼰대’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왜 그런지 이해하려고 하고, 변해가는 세상과 문화를 볼 때는, 나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마음을 닫는 모습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을 포함하여 동북아시아에 속한 나라들은 음식을 먹기 위하여 숟가락, 젓가락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사람들은 숟가락, 젓가락이 대신에 손가락을 사용합니다. 그거 비위생적이라 생각하고 보기도 안좋다 생각하여 한국사람은 잘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네팔의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손가락이 더 깨끗하다는 거에요. 비누로 깨끗이 씻고 먹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는 말이, 남의 입안에 들어갔다 나온 숟가락, 젓가락을 어떻게 내 입안에 또 넣느냐는 거에요. 아무리 씻었어도 그렇지!
그런데 자신의 손가락은 자기만 사용하니, 얼마나 마음 편하고 확실하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밥 먹을 때, 손가락을 사용하면 손맛이 있다는 거예요. 그 손끝 맛을 왜 숟가락, 젓가락을 사용해서 그 맛을 없애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들과 함께 먹을 때 손가락으로 밥을 여러 번 먹어 봤지만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었어요. 그게 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요즈음에는 젊은 청년들과 어린아이 중에 한 손이 아니라 양손을 이용해서 밥을 먹는 아이들이 있어요. 오른손은 젓가락, 왼손은 숟가락! 왜 그런가 물어보니 양손을 써야 뇌가 더 발전된다고 하여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면 여러분, 보기 싫습니까? 그래서 “그러지 말아라. 양손 쓰지 말고 한 손만 써라”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데 서양사람들 보십시오. 한 손에는 포크를 한 손에는 나이프를 들고, 양손을 이용해서 식사해요.
이런 문화적 다름의 얘기는 한도 끝고 없어요. 그런데 포인트는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고착화된 틀을 가지게 되면, 자칫 남을 정죄할 수 있으며, 내 자신도 마음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듣고, 보고, 관찰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 상황과 문제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이라면 판단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성경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학자라면 다양한 견해들을 듣고 연구하고 분석하여 성경과 어긋나지 않는 결론을 내리겠지요.
오늘 본문의 빌닷의 마음에는 욥기 교만하게 비춰졌습니다. 감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비춰진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오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 될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하니 빌닷과 그의 친구들이 욥의 생각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에도 같은 생각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기25:5~6)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그의 눈”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그런 뜻이죠. 그런데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이 말은 하나님의 눈은 더욱 더 빛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방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일월성신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크게 보면 연약한 존재인 사람들이요, 좁게 보면 욥 자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런 처지에 있어요. 몸에는 지독한 피부병으로 인해 구더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네가 지은 죄를 인정해라” 세상 말로 “네 주제 파악을 해라.” 이러한 자세가 욥을 향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입장이요, 욥을 돕기 위한 조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의 입장은 그 세 친구들의 주장과 다릅니다. 미리 결론을 찾아가서 볼까요?
욥기 42장 7절, 8절,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42:7~9)
하나님께서는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친구들이 생각과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고착화되고 화석화된 자신들의 지식과 주장이 욥을 힘들고 더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군가 성도 중에 더욱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우선은 그를 위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리고 어떠한 연유인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입 밖에 내서도 안됩니다. 어떤 확실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당회에서 기도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교회법에 따라 결정합니다. 치리가 필요하다면 치리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의 뜻과 긍휼과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42장을 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욥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과 전통으로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친구들이에요.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작아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욥이 그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그래,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니? 겸손하게 심사숙고하고, 근신해라. 잘못을 깨달아라” 그렇게 하지 않고, 욥은 그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의 모습을 보시고 흡족해 하시며 복을 주시니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이나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세가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왜 그렇겠어요. 영적 가족 아니겠습니까? 저 천국에까지 이어질 관계를 하나님께서 이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자녀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우리가 사랑하고 위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또 우리 산돌중앙교회가 천국의 모형을 이루는 사랑하는 교회, 축복받는 교회요, 성도가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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