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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10] 측량할 수 없는 주의 능력 앞에서 선 인간
운영자 2022-12-15 추천 2 댓글 0 조회 1016
[성경본문] 욥기9:1-12 개역개정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제공: 대한성서공회

측량할 수 없는 주의 능력 앞에서 선 인간

 

욥은 그의 친구 빌닷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입장을 피력합니다. 빌닷의 주장은 인과응보의 원리대로 욥이 고통당하는 것이니, 까닭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므로 속히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욥의 고통이 물러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친구 빌닷의 주장에 대한 욥의 태도는 긍정과 부정 두 가지입니다.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2절과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9:2~3) 무슨 뜻이겠습니까?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하나님과 비교하여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무엇이 그러한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고 4절에 욥이 고백합니다. 첫째는 지혜에 있어서 그러하며, 둘째는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요, 창조된 우주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갖고 계시니 5절부터 10절까지 그 능력에 대해 욥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5절에는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는 능력, 6절에는 땅을 움직이시는 능력이 있으시다고 했어요. 이와 같은 모습은 땅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화산폭발과 지진을 연상하게 합니다.

 

7절에는 해와 별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8절에는 하늘을 펴시고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고 했는데, 기상과 날씨, 바다의 태풍도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9절은 하늘의 보이는 천체를 창조하시고 질서정연하게 다스리시는 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0절에 그 능력을 한 문장으로 결론 짓고 있어요. 함께 읽겠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9:10)

 

그 능력에 반하여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11절과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9:11~12) 하나님은 영이시니 인간인 내가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빼앗아가시든 어떻게 무엇을 행하시든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반문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피조물된 인간의 모습이다 라는 것을 욥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13절에는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이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라합은 여리고에 살았던 한 여인,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이 아닙니다. 욥기와 시편, 이사야서에 라합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데, 라합은 하나님의 적대세력을 상징합니다. 앞서 우리가 7장을 묵상하면서 12절에서 본 바다 괴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들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겠거든 그런 뜻입니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측량이 불가능한 능력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욥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하나님을 향한 부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셔야만 하는지, 그리고 마치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이 끔찍한 고통을 거두어가시지 않으시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깨닫고자 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친구인 엘리바스와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의 말대로라면 죄 때문에 고난이 온다고 하는 것인데, 자신은 돌이켜봐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주신 계명들을 잘 지켜 행하였는데, 그러므로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지은 죄가 없는데, 그런데도 왜 이런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주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것이 그에게는 끊임없는 의문이요, 그러기에 고통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나눴습니다만 계속되는 주제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은 무엇 때문인가? 반면에 악인은 왜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답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기에, 인간이기에,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입니다. 15절 말씀이 그런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9:15)

 

욥의 이 고백의 뉘앙스는 자포자기입니다. 절망적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성으로 인해 기가죽은 모습이요, 그러기에 의기소침한 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는 깨닫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요, 둘째는 깨달음도 주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육신적 고통가운데에 있음에도 치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그의 심정에 있습니다. 깨달으면 좀 낫겠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세상 말로 표현하면,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마지막 절까지 절망에 빠진 그의 넋두리 같은 고백이 계속 이어집니다. 19절로부터 21절까지 함께 보시겠습니다.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9:21~23) 이러한 욥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치 원망이 가득한 불만의 어조로 들립니다.

 

여러분은 그럴 때가 없으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주님 기쁘시게 하고자 예배도 잘 지키고, 헌금도 잘 하고, 때로 금식도 하면서,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데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내게 질병이 찾아오고, 하여 건강을 잃게 하시며, 사업까지도 가라앉게 하십니까?”

 

오늘 욥은 이와 같은 처지에서,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싶은 자들의 대변자가 되어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다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제발 그 이유를 좀 말씀해 보세요~!”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깊고도 심오해서 사람의 짧은 생각과 논리와 이성과 경험으로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자, 양자로 삼으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게 하신 자들을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때, 통증으로 참기 어려울 때, 이성이 마비되고, 신음이 터져 나올 때 우리는 하소연 할 수 있습니다. 욥과 같이 외칠 수 있어요. 그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왜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겠어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이 아프면 보채요. 울어요. 해결이 안되면 떼를 써요. 때로는, 그러면 안되지만, 엄마의 가슴을 마구 치면서 울어요. 나 좀 어떻게 해주세요.” 아니겠습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거짓선지자들과 싸워 이기고도 그 결과로 이세벨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니 광야로 도망을 치다가 지쳐 로뎀나무 아래 눞습니다. 두려움이 가슴을 뛰게 하고 육신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을 때, 그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19:4) 얼마나 괴로우면 죽여달라고 외칩니다.

 

인간의 성정을 입으신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고통의 극점에서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기가 그렇게 보채고 힘들게 하고 울어대면, 땡깡을 부리면 엄마가 아기를 밖에 가져다 버립니까? 난 몰라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에요.

결국 욥기 결론으로 가서 보면 알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친구들보다는 욥의 편에 서서 욥의 손을 들어주시고, 그 끔찍한 육신의 질고를 온전히 고쳐주시고, 다시금 복된 인생으로 과거보다 더 크신 복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마치기 전 우리가 주의 깊에 볼 말씀이 있어요. 24절을 읽겠습니다.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9:24) 재판관이라는 단어를 봅니다. 32절과 33절을 찾아가서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9:32~33)

 

재판관 또는 판결자가 없다고 했어요. 이는 엄중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를 구하는 욥의 염원입니다. 누가 생각이 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로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신 분이 계시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천국복음으로 전하셨고, 천국 시민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여러 질문들에 답하시며 영적인 무지를 깨우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인생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다 짊어지시고 제물되시므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주를 믿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벽에도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비록 그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아들을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으니 마침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욥과 같이 우리도 고난 속에 많은 질문과 하소연과 의기소침과 토설적인 한탄이 있을 지라도 그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때가 되면 회복시키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셔서 이전보다 더욱 크신 은혜와 복있는 인생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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