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욥기8:1-1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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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제공: 대한성서공회
인과응보의 범주를 넘는 하나님의 손길
욥의 그 고통에서 배어 나오는 원망 어린 하소연이 그치자 그 곁에 있었던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등장합니다. 그는 친구인 욥이 그처럼 큰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고난의 원인과 이유를 생각하고 분석하였습니다. 그가 욥에게 하는 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과응보’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하는 것이죠. 죄를 지었으니 그 결과로 고난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소망이 있으니 지은 죄를 하나님께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고통을 거두시고 다시금 복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함께 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8:3) 정의와 공의를 굽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화가 임하였다.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8:4) 욥의 자녀들이 죽게 된 것이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임하였으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5절부터 7절까지 함께 보시겠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5~6)
이 말씀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이 표현은 “네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있는 형편이라 할지라도”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네가 간구하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니 다시금 창대하게 될 것이다” 발랏의 주장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빌닷이 욥에게 한 말 중에 틀린 말이 있습니까? 틀린 말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에요.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선한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조언합니다. “조상들을 보고 배워라!” 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욥8:8) 조상들이 터득한 일이란 그가 앞서 언급한 대로, “고난이 임하면 빨리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구하라!” “조상들의 그런 모습을 배우고 실행하라!”
친구 빌닷의 조언은 먼저 욥에게 얘기했던 친구인 엘리바스와 크게 다르지가 않아요. 그런데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이 오는 것은 죄의 결과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주시다.”라는 점이 강조되었다면 발랏은 “그러나 해결의 길이 있다.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돌이키면, 고통은 하감될 것이며, 고난은 물러갈 것이며, 다시금 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처음 친구인 엘리바스는 마치 기소하는 검사처럼 지은 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둘째 친구 빌닷은 마치 애정어린 판사처럼 용서받는 방법을 제시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감방에 들어가서 철저히 참회하고 새 사람이 되어 나오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두 친구의 고난에 대한 해석과 그 고난의 해결의 방법이 맞습니까? 옳은 처방을 내린 것일까요? 여러분이 만일 욥의 입장이라면 아멘으로 받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일로 병들어 병원에 입원을 하고 누워 있는데 찾아와서 하는 말이 “지은 죄 때문이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셔~! 그러니 얼른 회개해~! 철저히 회개해! 그러면 병이 물러갈거야~!” 기분이 괜챦겠어요? 뿔 딱지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너는 죄가 없어서 건강하니? 정말 죄 때문이라면 나 대신 네가 여기 누워 있어야 할 거다!”^^!
성도 여러분, 오늘 빌닷의 조언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악인을 벌하시고 선인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이 틀림이 없어요. 그러므로 죄를 범했는데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임하면 당연히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 어려움에 처한 본인이 먼저 잘 알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이라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찔림을 주십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에요.
그런데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교훈은 우리 하나님은 그처럼 인과응보에만 묶여 있는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꼭 지은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겠지만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상황도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를 통하여? 욥의 경우를 통하여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은 그 전통적인 해석에만 묶여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그렇게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율법주의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 흥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망한다.” 율법이 잣대가 되었어요. 그래서 율법에 얽매여 살려니 자유함이 없습니다. 안식일에 지켜야 할 율법만 39개 조항이 있어요. 이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나다!” 이 말씀의 뜻은 “안식일의 주인은 지켜야 할 율법이 아니라 바로 나다!”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느라 고생하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시라”(마11:28)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율법 위에 역사하시는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다”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법은 믿는 자의 심령에 은혜로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가 분부하신 일을 행할 때 억지가 아니요, 기쁨으로 행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와 같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30) 하신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갑니다. 인과응보로 인해 고난이 온다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도바울이 가이사 앞에서 목 베임을 당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통당하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이 아니지 않겠어요?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죄 없는 의인 욥이 고난중에 있는 것을 ‘인과응보’의 원리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어떻게 그 잣대를 들이대고 “네가 지은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 그러면 해결된다.” 이게 정답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논리는 또 한가지 질문을 가져오게 하니, 그러면 악인이 잘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죄 안지어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닌데? 그러면 건강하면 다 선하게 살아서 그런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깊고도 심오하여 우리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 뜻을 다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전통과 상식과 경험을 토대로 잣대를 만들어 상황 상황을 판단하고자 합니다. 나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면에서는 여전히 우리 인생은 더욱 주를 알아가야 합니다. 계시로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 그 뜻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통해 고난에 대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속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고난의 상황에서 계속 흔들리겠지요. 그 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가 걷는 인생 여정 길, 때로는 알 수가 없어요.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조만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 신실하게 살며, 새벽을 깨워 기도하며 열심히 사는 내게 질병이 찾아오고, 실직을 당하고, 그처럼 선교와 전도를 위하여 더 많이 드리고 싶은데 오히려 사업은 기울고, 부도를 당하고, 그 이유를 알래야 알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를 향한 신뢰를 놓으면 안됩니다. 소망의 끈을 놓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종래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방편이었고, 나아가서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기시는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요셉의 13년간의 종의 생활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이었습니다. 다윗의 10년간의 도망자의 생활은 이스라엘 땅의 지형지물과 나아가서 블레셋 나라의 지형지물까지 알아 백전백승의 전략을 세우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과 사도바울과 본회퍼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목사님의 순교는 무엇입니까? 천국에서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진리는 밟힌다고 죽는 것이 아니며, 죽음으로 진리를 수호하며 전하는 자는,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영원히 그 빛을 발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감동과 귀감이 됩니다. 어차피 살다 떠날 짧은 인생에 비하여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숭고한 것입니다.
억지로 합니까?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서 선교지로 가는 것을 억지로 합니까? 풍토병과 테러리스트의 위협과 사단이 공격하는 영적 전투를 두려워하면 가겠습니까? 그런데 자원하여 갑니다. 하나님 사랑이 그 심령에 임하면 고생이 고생이 아니요, 보람이 더 커집니다. 우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속단은 금물이에요. 믿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기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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