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욥기7:1-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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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사람이 그의 앞날, 그의 운명을 조금만이라도 미리 내다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더 뜻있는 인생으로 살까? 아니면 더 불행한 삶을 살까? 참으로 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많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지는 않으셨어요. 내일을 미리 알 수 있게 만드시지 않으셨어요. 그것이 창주조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저런 통계와 경험을 통해 예측은 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한 금번 월드컵의 예측 결과들을 보면 우리가 알아요. 예외와 예외의 결과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축구스타인 포루투칼의 호날두도 울었고, 영국의 케인도 울었습니다. 그 결과들이 이변의 속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내일을 내다 볼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욥이 만일 그처럼 격는 고통의 날이 일년이 안될 것이다 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그가 어떤 자세를 가질까요? 이처럼 좌절과 절망 속에 신음하는 모습보다는, 그래도 의인인데, 좀 더 소망적인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내일을 알 수 없어요. 여러분,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엄청난 시련 속에 있게 되면 그 상황 속에 잠기게 마련이에요. 그 상황에 압도당합니다. 그 상황이 끝이 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포자기하기 십상입니다. 내일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욥기 7장을 읽고 묵상하게 되면 참 마음이 짠합니다. 욥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몰라요! 육신의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7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욥7:5)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몸에 끼는 구더기는 주로 상피병을 앓는 사람의 살 속에 기생하고 자생 번식합니다.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다는 것은 피부병으로 인해 마치 코끼리 가죽과 같이 거칠게 부풀어 오르고 갈라진 피부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 날이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그가 한탄합니다. 1절에는 품꾼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신세는 그렇지도 못하다고 합니다. 품꾼은 그렇게 낮에는 힘들게 노동을 하여도 저녁이 오지 않느냐? 그러면 일을 마치게 되고, 삯을 받으며, 쉴 수 있는 밤을 맞이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욥 자신에게는 안식할 수 있는 밤도 없다는 것입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7:4) 쉬고 싶어도 잠을 자고 싶어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한탄합니다. 6절에 보니, 하루하루가 그저 소망없는 날 뿐이라. 빠르기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했어요. 베틀의 ‘북’이란 직조를 위해 실을 끌고 가로, 세로 왔다 갔다하는 배처럼 생긴 도구를 말합니다. 그처럼 빠르다는 것의 의미는 그 다음절에 ‘바람’이란 단어와 일맥상통합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욥7:7) 그런가하면 9절에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뜬구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의미가 있어요. 그것은 “매일 매일 한날 한날이 의미가 없구나~! 베틀의 북과 같고, 한낱 불어오고 가는 바람과 같고, 나타났다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뜬구름과 같구나!” 그런 뜻이에요. “이런 인생 의미가 없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생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고백은 극한 상황에서 견딜 수 없어 터져나오는 ‘한탄’이요, ‘넋두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극한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욥기는 한 인생이 당하고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진 재산 다 잃었어요. 그리고 자녀를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신의 육신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부터 마지막 절 21절까지는 그 내용이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제발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입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욥7: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의 괴물이니이까?” 이러한 표현은 고대 중동 신화에 등장하는 모습들을 연상케 합니다. 혼돈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바다와 바다의 용이 있어요. 그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창조주와 마르둑이 감시합니다. 욥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보호가 아니라 계속되는 감시와 억압이라는 것입니다. 밤에는 잠도 못 들고, 낮에는 육신의 고통으로 힘드니, 이런 모습은 숨막히는 하나님의 감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제발 나를 내버려 두세요!”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세요. 차라리 그게 낫겠습니다!” 15절 말씀이 그러한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욥7:15)
그런데 죽지를 못하니 고통이 끝나지 않아서 너무 힘들고 괴롭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20절과 21절을 함께 읽겟습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욥7:20~21)
여러분, 고통의 극점에 서게 되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수 있습니다. 이성은 머리에서 나오지만 감정은 가슴에서 나옵니다. 지금 욥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그 한계를 넘어 그 밖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 경건하지 못한 믿음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래! 나 같아도 그런 상황이 되면 하소연 할 거야~! 세상 그 누구에게 하겠어. 하나님 밖에 더 있어?”
제 어릴적 열한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시간이 가면 슬픔이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철이 들면 더 생각이 났습니다. 더욱이 막내로 누구보다 사랑받고 자라고, 공부도 잘해서 병석에 계신 어머니에게 기쁨이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면, 병을 이기고 일어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뜀박질도 잘해서 상으로 공책도 많이 받아다가 드렸어요. 그런데 떠나시고 말았어요. 제 마음에 하나님이 미웠습니다. “왜 데려가셨어요. 왜 빨리 데려가셨어요. 나는 하나님이 밉습니다.” 정말 많이 야속하고 미웠습니다. 말이 없는 소년이 되었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Life is blue! 인생은 슬프다! 그것이 저의 청소년기의 인생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감정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세요.
오늘 욥의 고백들이 그 고통와 고난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초두에 나누었습니다만 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 볼가 없어요. 그 고난의 날이 단기적이요, “일년 안에 끝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욥이 알았다면 어찌하든지 견디고 인내하며 그날을 소망 중에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당장 지금의 고통이 너무 크면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육신의 고통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제 경험으로 자꾸 나눠서 송구합니다만, 사실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내 경험처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송구할 수도 있겠지요.
제게는 일년에 두 세번 찾아오는 극심한 복통이 있었습니다. 선교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후 지난 7년간은 그 고통이 없어서 너무 감사해요. 한밤중에 찾아 옵니다. 잠이 깊이 들었어도 몸이 알아요. 아무리 깊이 잠이 들었어도 그 통증이 온다는 것을 몸이 알아요. 그러면 긴장하고 일어납니다. 화장실로 갑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장의 진통으로 인해 온몸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고 고통으로 숙인 얼굴에는 그야말로 땀이 뚝 뚝 뚝 뚝 바닥에 떨어집니다. 잠옷이 다 젖어서 몸에 달라 붙습니다. 그래서 그 느낌이 오고 잠이 깨면 아예 잠옷도 벗어버리고 고통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장이 꼬이는 듯한 통증으로 입에서는 신음이 배어 나옵니다. 한 시간 정도 지속됩니다. 처음에는 그 고통에 놀라서 지은 죄를 생각해 내며 회개 합니다. “하나님 이거 잘못했습니다. 저거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하는데도 계속 통증이 이어집니다. 극심한 고통에 제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차라리 죽게 해주세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아마도 암 환자들의 마지막 단계의 고통이 그렇지 않을까요? 그나마 모르핀이 있어서 어느 정도 하감이 될지는 몰라도~! 그 마약 진통제가 없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그래서 이 고통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 그러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가 그런 극심한 복통을 몇 번 겪고 나서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을 견뎌야 해! 그러면 지나가는 거야!” 지독한 마음을 먹고 참으며 견뎌냅니다. 물론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견뎠습니다. 사도바울이 들었던 음성을 제 마음에 되뇌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의 내용이죠.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7~9)
그런데 지금은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요. 지난 7년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해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배웁니다.
고난이 오고 고통이 올 때가 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내 곁에 믿음이 사람들 중에 그러한 자가 있다면, 우리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해 주어야지...,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합력하여 마침내 선을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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