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호세아1:2-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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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복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도 사람도 창조하실 때에 만드신 모든 만물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복 있는 인생이 된다함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복 있는 인생입니다. 인간 자신들 마음대로 구가하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계획하시고, 디자인하시고, 기대하셨던 그 모습으로, 복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서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나무에 열린 여러 개 열매 중에 하나 따 먹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 그리고 피조물 된 인간, 그 사이에 지켜야 할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자신이 순종의 관계를 깨뜨리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단이 그렇게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이루게 될 ‘샬롬’을 깨뜨려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영적으로 방황하고 유리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들의 죄악의 결과로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바라는 바대로 되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요10:10)라고 했는데 그런 불행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죄 중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원죄의 결과는 여러 죄악 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 그 나타나는 죄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이 아닙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희고 빛나는 옷을 입은 채로 진흙탕에서 뒹굴던 자를 그대로 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괜찮다” 하고 끌어안으셔도 안됩니다. 그 진흙탕에서 묻은 죄를 먼저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된 다음에 안으실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죄의 용서’를 뜻합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하마” 이렇게 쉽게 한 마디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댓가가 아주 큽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죄를 짐승에 전가시켜서 그 생명을 끊고 그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함 받는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형태의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짐승은 짐승일 뿐이지 죄 지은 인간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십니다. 성장하시고, 성인이 된 이후에 죄인 아니신 그 분이 죄를 다 짊어지시고 그러니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인류의 죄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피값으로 인간이 죄사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피로 우리 모든 죄가 용서함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죄를 포함하고 용서하는 큰 사랑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왜냐하면 호세아서의 처음부터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렵습니다. 왜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또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 이유를 “음란한 여인 고멜과 그의 자녀들은 곧 그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받아야 할 이스라엘이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왜 호세아가 이 일에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가? 그는 거룩한 사람이요, 선지자인데 이렇게까지 인생을 망쳐가면서 비극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왜 일까요?
긴 서론을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죄악된 음란한 아내 고멜을 받아드리고 그녀의 자녀들을 용서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호세아서를 통해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구원이 어떻게 임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타락하고 죄악된 상태에 있는 지를 먼저 보여주시고, 누구처럼? 고멜과 그의 세 자녀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습을 용서하시고 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이제 우리가 호세아서의 전체적인 주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호세아 이름부터가 이 책의 주제를 보여줍니다. 선지자 ‘호세아’의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그 이름이 파생이 ‘여호수아’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발음 할 때에 ‘예수아’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발음하는 ‘예수’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뜻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의 뜻이 구원자입니다.
호세아서는 그 이름의 뜻대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호세아가 누구냐? 선지자입니다. 어떠한 모습의 선지자냐? 예수님의 성품을 갖고 있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마음에 담고 우리가 호세아서를 읽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호세아서를 통해 주시는 구원의 도를 깨달으며,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2절에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왜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어서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해야 하는 호세아는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그 멧세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이 명령이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면 받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받아드리라” 아무도 받아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헌신입니다. 누가 하셨다는 것입니까? 호세아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끌어안으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병든 자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침 받은 병든 자에게는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에게는 “이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호세아가 순종합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이렇게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고 부친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이 사건이 꾸며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 사실로 이루어진 실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자녀들이 누구의 자녀라는 것입니까? 호세아의 친 자녀들 일까요? 아닙니다. 호세아가 아버지가 아닙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받아드렸으나 이 음한한 여자는 다름 사람의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 호세아는 그 아이들도 자녀로 받아드려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2절 중반부에 보면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낳으라”라고 하는 단어는 그 앞절에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의 “맞이하여”와 같습니다. 즉 “취하여” 그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그 뜻이 “음란한 여자를 취하고, 또한 그녀의 음란한 자녀까지도 받아드리라”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 용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아들의 이름이 이스르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심으신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4절 말씀, 좀 어렵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예후는 이스라엘의 10대왕입니다. 저가 장군이었는데 선왕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손 4대까지 왕노릇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이 가문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녀의 이름은 딸인데 ‘로루하마’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시는 하나님의 멧세지는 이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그 이름을 로암미 라고 했습니다. 그 뜻이 “나의 백성이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죄악에 빠져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배교 즉 바알신과 아스다롯 신에 빠져 있는 모습을 지적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장을 통해서 우리가 한 줄기 소망을 보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남왕국 유다백성을 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방법이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유다백성들의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전쟁을 통해 구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인류를 사망에서 구원하실 때에 로마를 칼과 창으로 압제하고 구하시지 않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과 11절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이 모습도 같은 구원의 모습입니다. 11절에 보시면 “한 우두머리”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가 누구시겠습니까? 영적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호세아서의 주제는 구원입니다. 그처럼 고멜처럼, 그의 자녀들처럼 죄악된 모습의 죄인인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포용하며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헌신을 우리가 대합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알고 주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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