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가복음16:1-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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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놀란 가슴 진정시킬 틈도 없고, 그 큰 슬픔으로 인해, 눈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저 지평선 너머로부터 부활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죽음으로 인해 슬픔으로 잠을 못 이룬 또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긴 밤을 지새우며 안식 후 첫날의 동이 트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안식일에는 죽은 사람의 몸에 향을 뿌리는 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을 기다린 것입니다.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동이 트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주검에 향유를 부어 끝까지 섬김의 예를 다 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마가복음 16장은 세 명의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모습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세명의 여인들은 예수님을 섬기던 자들로써 예수님과 깊은 사랑과 존경의 관계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이들 중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찌기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에게 병고침을 받은 여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가 이 여인의 마음에 늘 사무쳤어요.
둘째 여인은 알패오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제자인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아들 야고보를 예수님의 제자로 맡겼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예수님의 사역에 수종드는 일을 자처했던 여인입니다.
셋째 여인은 살로메입니다. 살로메는 그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둘 다 예수님의 제자로 맡긴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정성으로 수종들었던 여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람들이 여자들이라고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비록 이들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제자들을 능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적에 요한을 제외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다 두려워하여 도망했을 적에 그 자리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임종을 지킨 여인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결국 이 여인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그 첫 부활의 아침, 그 빈 무덤 안에서, 인류에게 주시는 가장 기쁜 소식을 천사로부터 듣게 됩니다. 마가복음 16장 5절과 6절을 읽겠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그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이 여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찬미합니다. “이 여인들을 진정한 ‘디아코네인’의 심볼이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정한 섬김의 모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특별히 이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그 그리움과 아픔의 눈물 속에서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빈 무덤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는 영광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또한 그 기쁨과 영광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첫 주인공이 됩니다.
안식 후 첫날, 미명의 새벽에 이 여인들에게 벌어진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는 영적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나는 얼마나 주님과 깊은 교제를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얼마나 주님 만나기를 고대하는가?”
“날 구원하신 주님과의 영적으로 풍성한 관계를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명한 교수님들로부터 귀한 가르침도 받았고 여러 학자들의 연구들을 접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서구신학이 추구하는 논리적인 학습능력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조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바빴습니다. 주어진 안식년 그 짧은 시간 안에 학위과정을 마쳐야 하니 그저 공부 공부 공부에만 필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영적으로 빼빼 말라갔습니다. 그야말로 영적인 면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습니다. 선교지에서 그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따르기를 원하던 주님, 그 주님을 향한 사랑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의 기도는 오로지 나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기도란 그저 학점을 잘 따고 학위를 받기 위한 나 자신의 지혜와 건강을 위한 것이었어요.
공부의 압박에 못 이겨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은 뒷전이었습니다.
주 관심사는 주님과의 나와의 깊어져야 할 관계가 아니라 나의 눈앞의 목적이, 공부가, 당장 감당하고 살아야 할 나의 일들의 성취가 우선순위의 맨 앞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혹 눈앞에 있는 나의 일의 목적과 성취 때문에 정작 깊어지고 풍성해야 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는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닌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물속에서 만난 막달라 마리아, 그러므로 예수님의 위로하심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저명한 성경주석가인 매튜헨리는 이와 같은 조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우리는 그를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잠언 8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이 주님과의 만남의 역사가,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실 때에 주의 사랑을 사모하십시오.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힘주시고 능력주시는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씻기시는 역사가 그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배우는 영적 교훈은 택한 자를 부르시고 또한 부른 자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부활은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에 보니 제자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이 모습은 13절에도 나와요. 엠마오 도상의 두제자의 소식을 듣고서도 계속해서 믿지 아니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과 3년간이나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분의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몸소 체험한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합니다.
기적을 보지 않고 믿는 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 함께 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저는 이와 똑같은 상황을 선교지에서 수도 없이 경험합니다. 전도할 때에 경험합니다. 힌두교 신자들, 불교 신자들....... 들을 적에는 잘 듣지만 결론은 다시금 자신들의 믿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럴 적마다 참 맥이 빠집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어! 보지도 못했는데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그러나 이와 같은 맥 빠지는 상황은 금방 회복됩니다. 어떻게, 왜 그럴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저는 그 힌두교와 불교신자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적이라고 밖에 다른 설명이 없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목도하지 아니했으며 빈 무덤을 본 체험도 없으며 예수님의 꾸중도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으로부터 돌이켜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 중에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믿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에 한 사람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듣고서도 믿지 못했던 부활의 주님을 우리에게 기적같이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크고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여러분의 가슴을 가득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눈물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크나큰 영광을 입었습니다.
우리고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일 이른 아침 주를 만나십시오. 기도 중에, 말씀을 묵상하고 듣는 중에, 찬송을 부를 때에,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곁에 계신 주님을 만나시고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힘차게 행진해 나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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