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태복음15:1-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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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이 있었는데 이를 율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바탕으로 해서 랍비들이 만든 행동 규범이 있었습니다. 이를 유전(한글개역본) 또는 전통(개역개정본)이라고 불렀습니다. 율법과 유전가운데 기본이 되고 모범이 되는 것은 당연히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율법보다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수 천 개의 유전 즉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아주 극렬히 정죄하곤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일로 지켜야 하는가? 그 행동강령을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 였는데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니 짐을 날라도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유전으로 만들었는가하면, 그 무게를 정한 것입니다. 마른 무화과 한송이 무게에 해당하는 식물까지만 나를 수 있다. 요리를 할 때에 반죽에 필요한 포도주를 사용할 때에는 그 양을 한 잔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상처에 바를만한 소량의 꿀은 괜챦고, 눈에 바른 고약을 떼어낼 만한 소량의 물은 괜챦고, 글자를 쓴다면 두 글자를 쓸 만한 잉크 정도는 사용해도 된다.
안식일에는 병 고치는 것도 노동이니 안된다.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기 위해 싸매는 것은 괜찮아도 약을 바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세부규칙조항들이 약 800페이지에 달하는 ‘미슈나’라고 하는 책에 빼곡히 기록하고 그것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하는 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지켜보곤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안식일에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일한 것으로 본 것이에요. 그리고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자신이 누웠던 들것을 들고 가는 것도 노동이 되니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었어요. 이와같은 지나친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아픈자를 고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안식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시면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놀라며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안식일을 범한자로 낙인찍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만든 규칙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사람의 말, 즉 유전만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다녔어요. 결국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라고 하는 율법의 본질을 잊은 채, 스스로가 만든 유전, 그 올무에 사람들을 묶고 자신들도 묶여 있었던 것이었어요.
오늘 성경에서 2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여, 당신의 제자들이 떡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으므로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소”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3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예수님은 그 실례로 저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세요. 4절과 5절,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질책하시는 거에요. “하나님께 시간을 드렸기에, 물질을 드렸기에, 제사를 드렸기에, 실제적으로 섬겨야 할 부모에 대한 예를 다 드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것은 위선이다.” 그 모습은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책망하십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여, 시간이 없다고, 물질이 없다고, 그래서 부모를 찾아뵙지 않는 것, 공양하기를 게을리 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는 말씀이에요.
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잘 하시겠지요. 저는 고국에 들어와서 일주일에 하루 쉬는 월요일이면 으레 연로하신 장인 장모님을 찾아뵙곤 합니다. 부천에 살고 계시니 멀지는 않아요. 지난 주일에는 주일 저녁에 찾아 뵈었습니다만, 이제는 80후반에 이르신 두 분에게 늘 죄송한 부분이 많습니다.
저와 아내는 지난 24년간 선교지에 있으면서 효를 드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에요. 그 긴 세월동안 타지에 있는 딸을 염려하며, 선교를 위해서 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몰라요. 저와 아내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불효를 했다손 치더라고 이제는 국내에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변명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월요일이면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교회일이 바빠지면서 처음과 같이 매주 월요일은 아니지만, 가급적 찾아뵙습니다. 어디 몸이 불편하신데는 없는지, 침을 놓는 한약방에 모셔다 드려서 침도 맞게 해드리고 도울 수 있는 한 돕습니다. 그래도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위선자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오도된 모습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8절에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으로 대신하세요. 8절과 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음과 몸이 결여된 입술만의 신앙 고백은 헛된 것입니다. 큰 범위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인간관계를 잘 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드림은 드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그것은 아니다” 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 바리새인들을 영적인 소경이라고,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며, 복 있는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15장 말씀을 통해 두 번째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가나안 여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사 거기서 사역을 하실 때에, 귀신들린 딸을 둔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에요. 다른 민족이지요.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믿음의 주인공이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가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녀의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떠한 믿음이었을까요?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Keyword(키워드), 즉 중심 단어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 있어요. 그것은 22절에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 Lord, Son of David!"입니다. 여기에서 “주, 다윗의 자손” 이란 말은, 주가 다윗이 아니라. “주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그런 말입니다.
이방민족의 여인으로써 모두들 바알신과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을 섬길 때에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로 즉 “메시야”로 믿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를 “퀴리오스” “주님”으로 부릅니다. 주님은 뭐에요? Lord!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린 것이에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자신의 피를 가진 분신 아니겠어요? 그 사랑하는 딸이 귀신에 들렸으니 그것도 22절에 보니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했어요. 어떻게 밥을 먹으며 어떻게 잠이나 제대로 자겠어요? 하루 하루가 고통 아니겠어요?
저도 자녀들을 키워왔고 지금도 키워가고 있지만, 조금만 아파도, 또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세상으로 가지는 않을까, 잘못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돼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는 늘 염려가 되고 또한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고 계셨어요. 남다른 믿음,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오직 예수님만이 살길이다.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그런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그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른 예수님 답지 않은 모습을 연출하십니다. 그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약한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를 믿던 믿지 않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먹이셨던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주 냉정하게 이 여인을 대합니다.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여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에 예수님의 대응은 아주 차갑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자녀란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개들이란 가나안 사람들을(블레셋 사람들, 이스라엘을 그렇게 공격하고 전쟁을 이루던 민족) 지칭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냉정한 어조로 거절하셨을까요? 답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미리 보신 주님께서 그렇게 말해도 이 여인이 포기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옆에 제자들이 보고 있어요.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과연 이 여인은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저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의지 할 것인가? 그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인가?
그때에 여인이 응답합니다. 27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무슨 말씀이에요? “맞습니다. 나는 이방여인입니다. 이스라엘과는 적국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들 중에서 어렵고 힘들고 병든 자들을 구하십니다. 우리에게까지 도우실 의무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러나, 저도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니 베푸실 은혜가 남아 있거든, 저에게도 자비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제 딸을 고쳐 주옵소서”
예수님은 알고 계셨지요. 이 여인의 아픔도, 그리고 이 여인의 믿음도,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러나 제자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 믿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어떠한 말에도 결코 뒤로 후퇴하지 않는 믿음, 철저히 주님만을 믿는 믿음, 어떠한 자존심을 상하는 상황이라도 살길은 주님 밖에 없다고 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문제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신년도 기도제목을 받았습니다. 많은 경우가 가족의 건강과 일과 믿음입니다. 그런데 제일 많은 부분이 가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믿게 해 주세요.” “믿음으로 돌아서게 해주세요.” “취업하게 해주세요.” “건강 회복되게 해 주세요.”
오늘 이 가나안 여인은, 딸을 불쌍히 여겨, 딸 대신 자신이 예수 앞에 찾아 온 것입니다. 엄마로써 당연한 모습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자리에 오지 못한 그의 딸의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이 새벽에, 여러분 중에도, 그러신 분, 왜 없겠습니까? 자녀의 아픔과 어려움을 놓고 대신, 이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기도하며 강청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존재가 가정을 살립니다. 생업을 살리고, 직장을 살리고, 이웃들을 살립니다.
오직 주 예수 만이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 이 강한 확신, 믿음으로 기도하셔서 응답받으시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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