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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16] 예수께서 더디 오시는 이유
운영자 2020-01-21 추천 3 댓글 0 조회 823
[성경본문] 마태복음14:22-33 개역개정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께서 더디 오시는 이유

 

평온한 갈릴리 바다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폭풍이 일어난 것이에요. 그것도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파도가 치고 제자들이 탄 배는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은 호수에 바람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갈릴리 바다에는 돌연 폭풍이 일어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잔잔할 때에도 배를 타는 사람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기온의 변화에 따라, 갑자기 내리쳐 부는 돌풍이, 무섭게, 호수면에 파도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있어요. 낮 동안 온종일 뜨거운 햇볕이 호수 면에 내려 쪼여 증기가 올라가고 그렇게 되면 호수면의 공기가 점차로 희박해지게 됩니다. 특별히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산위의 공기가 갑자기 냉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식지 않은 수면온도와 산위의 기온의 차이가 급격하여, 돌풍이 생기게 되는데, 이 돌풍은 낮은 호수면으로 무섭게 내려 불어서, 파도가 출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다 위의 배를 무섭게 흔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돌변적인 어려운 상황이 그 밤에 그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에게 닥쳐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마태는 이 긴박한 상황을 시간대로 잘 정리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성경 본문 1422절에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 않으셨는가? 본문에 보니 예수님은 아직 남아 있는 일이 있으셨어요.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인 무리, 오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경험한 저들을 배웅하는 일이었습니다. 길 잃은 양과도 같은 당신의 민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상하신 예수님의 목회적인 한 면을 우리는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둘째는 23절에 보니 기도하러 가시기 위해서였어요. 한 사역을 마치고 또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처럼 놀라운 권능으로 일하셨던 예수님께서도 오천명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또한 먹이시는 엄청난 일을 하신 후에 곤하신 몸, 쉴 여유도 없이 산으로 가셔서 철야 기도를 하신 것이에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의 일을 감당하면서,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을 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또 다시 놀라운 치유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을 볼 때에, 이는 갈릴리바다 건너편, 게네사렛 땅에서도 복음을 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1434,35,36절이 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어요. 폭풍이 몰아쳐온 것입니다.

마태는 그 상황에 대해서 2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똑 같은 상황 속에서 그 자리에 있었던 또 하나의 제자인 요한은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618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그러므로 이 예기치 않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갈릴리 바다의 한 복판에서 큰 바람을 만난 그들은 역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뭘 잘못하였기에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갈릴리 바다 건너편 게네사렛 지방에 복음을 전하러 가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일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도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도무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상황이 터질 때가 있어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 오늘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주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며 수고하며 애쓰며 믿음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데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쓰는 가운데에도,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되면 우리 믿음의 성도들의 마음은 시험에 들기 십상입니다. 마음에는 퀘스쳔 마크로 다가옵니다.

왜 하필이면 선한 일을 하는 나에게? 왜 이처럼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선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데,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긴단 말인가?” 의문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 모습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셨는데, 그래서, 그 어려운 상황에 도무지 오실 수 없으려니 하고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도우러 오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기치 않게 인생여정에 풍랑을 만나고, 그 한복판에서 항구를 향해, 그 목표를 향해 괴로이 노 저어 나아갈 적에, 우리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에 그분은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바로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님 이십니다.

파도를 잠잠케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목적지까지 무사히 당도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좋은신 우리 주심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여전히 남아있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제자들이 고통에 처해 있을 때에 곧 바로 오지 아니하시고, 밤새도록 한 자리에서 전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서도, 그냥 내버려두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날이 저물 때에 그러니까 저녁에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녁에 배가 출발 한거죠. 그런데 풍랑이 일었습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거의 제 자리를 맴돌았어요. 성경말씀 24절에 보니 바람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수리를 갔다고 했는데, 25절에 보니 예수님이 나타난 시간은, 밤 사경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밤 사경이란 곧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밤새 그 풍랑의 한 가운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서 괴롭게 노를 젓게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왜 예수님은 바로 달려오시지 않으셨을까? 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셨을까?

예수님이 바로 오시지 않고, 한참이나 수고하고 애쓰고 괴로워하는 가운데 있는데도 그렇게 늦게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영적 교훈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가운데 그들을 구하실 분은, 오직 주님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예수님!

것은 바로 고통가운데 그들을 구하실 분은 오직 주님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에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배를 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어부들 아니었나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갈릴리 바다에서 자라나서, 어부로써 누구보다도 그 바다를 잘 알고 밤이든 낮이든 물고기를 낚았던 저들, 그러나 밤이 다 가도록 전진을 하지 못합니다.

 

나의 스스로의 애씀,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않되고, 함께 노를 젖는 나의 동료의 수고로도 않되고, 그래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에그래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나의 지식, 나의 경험, 나의 재물과 나의 재능.... 그 어느 것으로도, 나를 건질 수 없고, 구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에, 그래서 그처럼 중히 여기던 나의 모든 자랑과 교만과 능력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그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아,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함으로,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 참 쉽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고 경험을 의존하고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 나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도와주옵소서!” 기도할 때에 우리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도우십니다. 이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이 늦게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또 다른 곳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난 죽은 나자로를 살리는 사건입니다.

 

주의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즉시 사람을 보내었어요. 이들은 워낙 예수님이 저들을 사랑하시기에 곧바로 예수님께서 오실 줄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의외로 태연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오히려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6) 그러는 사이에 나사로의 병세는 점 점 악화되어갔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11:4)”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셨고 그래서 움직이지 않으셨던 것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부르러 보낸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예수님만이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틀을 더 유하는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두 누이는 실의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그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한 것은 4일 뒤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마르다가먼저 듣게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그 소식에 곧바로 예수님을 맞으러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마리아는 실의와 상심에 잠긴 채 집안에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가 상심에 잠긴 소리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께서 만일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겁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날 것이다.(23)”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훗날, 마지막 날, 여호와의 심판이 임하는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었어요.

 

그때에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확신을 시키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나 마르다나 마리아나 이는 나중에 부활할 것을 믿었지 당장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으로 믿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 다시금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침묵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그 기간이 고통의 기간이 된다고 할 지라도 주님을 향한 신뢰를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이 오랜 침묵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멧세지는 무엇일까? 무엇을 더 깨우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지금껏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주님의 새로우신 면을 배우게 하시려는 거야!” 하시면서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더욱 그 주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만드십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이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때때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기나긴 침묵을 통과하므로

비로소 더 크신 주님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피조물된 우리 인생의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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