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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14] 제도에 얽매여 생명 살리는 일을 그르치지 마라
운영자 2020-01-16 추천 3 댓글 0 조회 895
[성경본문] 마태복음12:1-21 개역개정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도에 얽매여 생명 살리는 일을 그르치지 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리새인들의 신앙관과 예수님의 행동이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표현은 613개 조항의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위는 율법 하나, 하나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기본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은 크게 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성격지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제1계명인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부터 시작하여 제4계명인 안식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 까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가하면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부터 제10계명인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마라 까지는 사람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을 39가지로 규정하여 지켰는데, 그 중에 한 가지는, 생명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않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마름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사실 그 손마름병은 당장 죽을병이 아니니 다른 날 고쳐야 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22절 이하에 보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도 고쳐주셨습니다. 그 날 안고쳐도, 다음 날 고쳐도 되는데 왜 안식일에 고치느냐? 그러면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잇길로 가실 때에 제자들이 배가 많이 고프니 밀밭에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이 모습은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추수를 못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죄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응하셨습니다.

 

첫째, 3절과 4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에도 배고프면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근거로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부하들이 몹시 시장하여 제사장들이 먹어야 할 성전 안에 진설된 떡을 먹지 않았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둘째, 5절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성전 안에 있는 동안에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다는 이유로 괜찮다 고 대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6절에 하시는 말씀이 나는 성전보다 더 큰 자니라 고 예수님 자신은 성전보다 더 큰 이시니, 당신은 안식일의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으로 피력하셨습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8절에 예수님의 권세를 주장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보다 더 크신 이가 바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란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몹시도 언짢았습니다. 14절 말씀에 보니 심지어 저들은 마음에 예수를 죽여야 겠다 고 하는 독한 생각을 먹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의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 하나, 하나에 치중하는 한편, 예수님은 율법의 큰 틀, 큰 주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에 초점을 맞추니, 그런 선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굳이 하나, 하나, 39가지의 안식일 법에 얽매여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안된다는 입장이셨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강조점은 12절 말씀에 있는 대로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양보다 더 귀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안식일 사건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은 이웃사랑이라고 했으니 어려움에 처한 형제, 자매, 이처럼 병들어 인생이 힘들고, 귀신들려 정상생활이 안 되고,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자들을 살리는 일에는 어떠한 규약이나 제재에 구애받지 말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생존권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살리고,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은,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리핀에서 사역을 감당할 때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먹지도 못하고 탈진상태가 됩니다. 방치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대심방을 한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다급하게 한 사람이 와서는 자기 집에 와 달라고 해요. 교회도 나오지 않는 믿지 않는 사람인데.... 가서 보니 한 남자가 누워있는데, 나체에요. 말라리아로 열이 나고 몸이 불덩이가 되니 옷을 벗겨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대신 바나나 잎으로 덮어 두었습니다. 바나나 이파리가 차갑거든요. 열을 식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들이 하는 얘기가 마마마따이 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 곧 죽을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보니 병원으로 옮기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아직 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화산 이재민 촌에 들어온 적십자사에 도움을 요청하려 갔습니다. 마침 휴일이라 간호사는 없고, 차가 있어요. 기사도 있어요. 제가 부탁했어요. “병원까지 실어다 달라 차량 비용은 지불하겠다.” 그런데 안된다는 것입니다. 허가없이 차를 움직이다가 행여 사람이 죽으면 그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상부 허가없이 차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핸드폰도 없으니 상부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요. 제가 화가 치밀었습니다.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러지 말고 가자” “안된다한 찬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찦푸니 한 대가 들어왔어요. 그 차를 이용해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응급실로 들어가고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링거가 들어가고 그렇게 두 시간 지났을 때에, 이 사람이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두 시간이 지났을 때에, 일어나더니 배가 고프다는 거에요. 저와 아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빵을 사다 주었습니다. 차량 대절비도, 병원비도, 이후 음식비까지도 다 저희가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일에 교회에 나왔어요. 예배 중에 간증할 사람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파스토 킴이 나를 살려 주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가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형제를 사랑하셔서 살려준 것이라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리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일로 여러 사람을 병원으로 옮겨 살아나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돈이 없어서 당황하다가 이웃에게 돈도 여러 번 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감사요, 보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선교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는데 필리핀에서 선교사 경험이 있으신 교수님이 자신의 간증을 하는 거에요. 어느날 밤,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급하게 문을 두드리면서 자신의 아이가 죽을 것 같다고, 얼른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도와달라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보니 아이가 추욱 늘어져서 정말 많이 아픈 모습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안 도와주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한사람을 도와주게 되면 또 같은 경우가 발생할 때에 안 도와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공평성에 어긋나서, 현지인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하여 도와주지를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아이가 그날 밤 병원에 가지를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님은 말하기를 이러한 상황이 선교지에서 있을 수 있다. 돈이 없어서 못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 또 지키기 위해서 때로 냉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때에 선교사는 참으로 고민스럽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말하는 거에요.

 

저는 그 교수의 말을 듣고서, 선교지에서 여러 번 그런 상황을 경험한 저로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면 내가 바보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공평성을 운운하며 외면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서양선교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제가 그런 모습이 이해가 안되었어요. 저는 그 교수에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시기 위해 선별적으로 선교사에게 맡기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이 매일 발생하는 것 아니지 않느냐?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일단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 나중에 같은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당장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

 

그 교수님은 끝까지 아니다. 원칙이 중요하다. 공평성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선교사를 의지하고 기댈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다 감당할 거냐?” 제가 그 날 기분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평생 손마름병으로 고통을 당한자를 외면하고 고치지 말것인가? 아니요. 바로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 왔는데 아냐, 오늘은 안식일이니 고칠 수가 없어 다음에 합시다.” 예수님은 그러시지 아니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 말 못하는 저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고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얼마나 기뻤을 까요?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 아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율법으로 얽매인 시대에 그 율법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로써, 오랜 세월 속에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전통과 규약, 관례와 제도에 얽매여, 마땅히 사랑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 전통과 규약은 개혁해야 합니다.

 

내가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손해도 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예수의 사람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니 그 손해를 갚아 주십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필리핀에서 제자훈련하는 한 형제의 아내가 출산을 위해 병원에 들어갔는데 자궁에서 나오는 아기 머리가 산모의 골반뼈에 걸려서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왕절개 수술하지 않으면 산모도 죽고, 아기도 죽는 상황에 접했습니다. 수술비가 비싸요. 보험도 없으니 1,200불이 필요한데 그런 돈이 저희에게 어디 있어요? 당시에 저희는 산돌중앙교회로부터 매월 생활비로 700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려운 사람들 돕느라 저희는 한달, 한달 겨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그 때에 선교 훈련 받으러 제 집에 와 있던 자매가 있었어요. 그 자매가 저희에게 말했어요. 선교사님 또 돈 꾸실 거죠. 저에게 천불이 있어요. 저에게 안꾸시면 제가 화날 거에요.” 그래서 감사하게 빌릴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산모도 살고 아기도 살았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여 아빠도 엄마도 아가도 신실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꾼 돈은 서서히 다 갚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이웃들에게 주차장을 개방하고, 교회의 담을 없애고, 가능하다면 24시간 예배당 문을 개방하여,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 죽고 싶은 사람이, 예배당을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으니 들어와 기도할 수 있도록, 통곡할 수 있도록, 예배당을 공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손해가 있겠지요. 손해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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