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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13] 사명으로 사는 인생
운영자 2020-01-14 추천 3 댓글 0 조회 722
[성경본문] 마태복음11:2-15 개역개정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사명으로 사는 인생

 

오늘 말씀에 보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저들이 따르는 스승인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세례요한은 아주 의로운 선지자로써 헤롯왕의 잘못을 지적하였기 때문이었어요.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헤롯은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그런데 그가 감옥에 갇히기 전에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확실히 가르쳤습니다. 장차 오실분이 계신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나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백성들을 죄악에서 건지실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라고 권했어요.

 

그러기에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께 온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 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저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을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메시야가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대망하던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답변을 듣고 떠나가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대중들의 그릇된 오해를 막기 위해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세례요한은 구약의 어느 선지자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을 말씀하세요. 또한 메시아가 오심에 있어서 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 광야에 있는 그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를 하고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하기 보다는 그저 호기심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7절에 이렇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여기에서 갈대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례요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이 질문 다음에는 이런 말이 생략되어 있어요.

 

너희들이 세례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정도로 생각하고, 그를 보러 광야에 나갔다면 그렇다면 너희들은 틀렸다왜냐하면 세례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굳세고 결연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사명에 흔들림이 없었고, 말에 있어서, 결코 변덕스럽지 아니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대중들의 박수갈채 속에서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헤롯의 격노의 폭풍이 사납고 거세어졌을 때에도,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세파가 어떻든지간에 그는 변함이 없었어요.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증거는 갈대와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그는 결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결같은 세례요한의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은 칭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세례요한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에 광야의 바람에 꺽이는 갈대와 같은 모습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초지일관의 모습으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더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통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8절에 보면 예수님이 또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으 입은 사람이냐?” 그러면서 답하시기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세요.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세례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는 사람들, , 궁궐에서 호례호식을 누리는 자의 모습도 아니라는 것이에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왕궁에나 있다.” 사명자들, 복음을 전파자들은 왕궁의 대신들과 많이 다릅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메뚜기와 석청으로 그리고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추위를 견디며 심플한 삶을 살아간 세례요한, 그는 오고 오는 사역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처럼 칭찬한 세례요한은 진정한 선지자의 모습으로 살았어요.

사람들의 인기와 상관이 없이 홀로 빈들에 거하며, 그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검소하게 살았고, 그러한 거룩한 삶으로 인해, 누구 앞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광야의 영성을 갖게 하소서.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명예에 눈이 멀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로 인해 말씀의 대언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결론을 이렇게 내리십니다. 9절 말씀,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더 나은 자이니라.”

 

세례요한은 진정한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상이라고 말씀하세요. 11절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세상 사람의 평가와 예수님의 평가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누가 더 큰가? 세상의 잣대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입니다.

 

16절과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물로 세례를 베풀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장례식 놀이에서 애곡하여도 따라서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처럼 세례 요한의 선포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기쁨의 삶을 사셨어요. 모든 율법적인 구속들을 깨뜨려 버리고 진정한 신앙인의 삶의 자세로 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고 먹고 마셨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기쁨에 가득 찬 예수의 복음 선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결혼식 놀이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아이들처럼 예수의 선포를 무시했던 것이에요. 오히려 예수의 행동에 대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여기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표현은 성경 원어에 따르면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행동을 제멋대로 매도해 버린 것입니다.

 

이같이 볼 때 본장의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는, 세례 요한도 거절하고 예수도 거절한 유대인들의 무지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 비유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을 거절한 것이 바로 예수의 사역을 거절한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과거 예수님 때나 오늘날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은 증거되고 있지만 듣고 따르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방송을 통해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행을 통해서, 때로는 쓰나미나 지진과 같은 경고의 나팔을 통해서, 주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가 말한 것처럼, 무감각한 세대, 무관심한 세대, 무책임한 세대로써, 자신들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하직할 날이 다가오면서,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저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예수 믿고 사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이러한 구원받은 백성들 중에 여러분과 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전히 인생은 곤고하고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슴 졸일 때가 있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강을 얻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지어야 할 멍에가 있다고 말씀하세요. 여기에서 멍에란 주님도 함께 지시는 멍에를 말씀하십니다. 그럼 어떤 멍에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도 지시는 멍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메신 멍에는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 것이에요. 그 일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메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배우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 할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하십니까?

 

우리 마음이 비로소 쉼을 얻는다 약속하세요. 그 멍에가 무겁지 않은 것은 뭐예요? 우리 주님이 함께 지어주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함께 지어주시기 때문에 결코 짐이 아닌것이에요. 기쁨이요,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안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므로, 섬기는 교회에 봉사하므로,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쉼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봉사가 힘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기쁨이 있고 마음에는 평강이 임합니다. 신비하죠.

 

이와 같은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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