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태복음7: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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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성품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것은 외식과 교만이었습니다. 외식은 가식이란 말과 비슷합니다. 그 뜻이 “겉은 그럴 듯한데 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 격언에 “겉 다르고 속 다르다” 라는 말이 있어요. “이중적이다” 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또 다른 말로 “쇼(Show)한다” 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과일 중에 바나나와 망고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나나는 겉은 노란데 껍질을 까보면 속은 하얗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망고는 겉이 노라면 속도 노랗습니다. 아직 익기 전 겉이 초록색이면 속은 흰색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익으면 껍질도 노랗게 되고 속은 영락없이 노랗습니다. 맛있어요.
교만은 겸손의 반대말입니다. 남들보다 자신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은 남들보다 월등하다” 그럴 수 있지요. 학벌에서, 또는 재산에서, 외모에서, 또는 건강에서 나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여기까지는 괜챦아요. 비교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좀 낫다고 남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때로 업신여기고, 그러다보니 이와 같은 교만한 마음에 상좌를 좋아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자 합니다.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만의 가장 큰 문제는 그 교만함으로 인해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남을 바라보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의 성품, “외식과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와 같은 좋지 않은 성품의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예~, 저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모습들이 “자기義” 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율법의 실천은 겉으로 드러나지요. 그런데 속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곧 속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시하셨습니다. “너희는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
또 저들에 대해서 이렇게도 말씀하셨어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율법은 잘 지켜 행했습니다. 박하도 드리고 회향도 드리고 십일조도 드렸어요. 그런데 정작 믿음의 사람으로써 갖추어야 성품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정의, 바르고 옳은 것이지요.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그러니 돕는 모습입니다. 믿음,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좀 비논리적인 것 같아도 성령이 도우시니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안지켜도 되는가?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율법도 지키고, 그리고 그 율법은 먼저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오늘날 십일조는 안 드려도 된다. 진보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교회 안에 헌금드리는 것이 아깝다고 여기는 자들 중에서 주장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졌으니 성전에 가서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구약시대는 율법시대지만 신약시대는 은혜시대다 그러니 율법적인 십일조를 안 드려도 구원받는다.” 또 자신 있게 말합니다.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께 있다.” 맞지요. 예수님이 기준이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일조를 드렸느냐? 그가 십일조를 강조했느냐?” 그렇게 또 타당성에 의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도 지켜행하고 마음도 진실해라.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드릴 때에 율법을 지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려라” 향료의 십일조, 즉 곡물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라” 십일조를 드리는 율법을 지켜 행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한다 고 강조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해고자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말씀이해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산상수훈에서 7장 1절과 2절에 말씀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누구를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 바리새인을 가리켜 한 예로 저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비판 이라는 말은 성경원어로 κρίνω(크리노)라고 합니다. 그 뜻은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비난’과 ‘심판’입니다. 본문의 문맥상 그 뜻은 ‘심판’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에 이렇게 읽으셔야 합니다.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심판하지 말라” 누가 심판한다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거에요.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마을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그러나 심판의 권한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심판하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교만한 것이에요. 그러니 심판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너희가 하는 그 심판으로 도리어 너희가 심판을 받는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헤아려주어라” “불쌍히 여겨라” “긍휼히 여겨라”
여전히 믿음이 연약하니, 주일 오후 예배나 삼일예배 빠질 수도 있고, 남편이 믿지 않으니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해요. 자신이 받는 생활비의 십일조만 드려요. 먹고 사는 것이 힘이 드니, 돈을 더 벌려고, 주일에도 출근을 해요. 주일에도 영업을 해요. 그것이 죄책감이 되요. 그럴 때에 심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긍휼히 여겨라” 믿음이 더 성장하면 “주일에 일하지 않는 직장을 택하게 될 것이다.” “주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교회가 새해부터 아침 7시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그러한 것입니다. “주일 범한다고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주일예배 일찍 드리고 직장에 출근해라”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과 그 상황을 교회적 차원에서 헤아려주는 것입니다.
때가 오겠지요. 믿음이 성장하면, 온전히 주일성수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그것이 주 안에서 진정한 안식이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봉사가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또한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은총으로 베푸시고, 더 큰 복을 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봉사라고 하는 것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봉사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우리를 위한, 모두를 위한, 교회를 위한,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봉사 아니겠습니까? 주일에 장로님들 보세요. 남들은 커피마시고, 교제하는 동안에 헌금 계수하는 일로 바빠요, 또 주일예배 마치면, 중직자 성경공부로 바쁘고, 요즈음에는 리모델링한다고 하니, 한 장로님은 교회로 출근했다가 직장으로 가세요. 또한 연말연시 예결산 준비로 많이 바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의 헤아림과 긍휼의 발로에요. 실천이요. 행동인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자” 아니겠습니까? 이 믿음 때문에 장로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권사님에게 주시는 복이 있고, 안수집사님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괜히 기름 부어 직분자로 세우고 안수하여 일꾼으로 세우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바리새인이라는 존경받는 자리에 서고, 그런데 그것이 교만이 되어 상좌에 안기를 원하고,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지적하고 심판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로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더 큰 죄가 있다. 들보같은 죄가 있는데, 기둥만한 죄가 있는데....., 왜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느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선교지에 있을 때에 처음 듣는 말이었어요. ‘내로남불’ 이게 못 듣던 말인데 어느 고사성어집에 들어있는가? 사서삼경에 있는 말인가? 궁금했어요. 내 자는 한자로 뭐며, 로 자는 한자로 어떤 뜻인가?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내’ 자는 내가 하면, ‘로’ 자는 로맨스, ‘남’ 자는 남이하면, ‘불’ 자는 불륜! 이게 한글과 한자가 이루어진 신조어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외식으로 겉과 속이 다르고, 그것이 의의 기준이 되어 남을 비판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닮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교훈하고 계십니다. 과연 이 영적 가르침에서 완전히 자유함을 입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저를 포함하여 우리는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국에 돌아와 목회를 하려니 선교지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고 장례식을 집례하니 감사하다고 사례를 하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고 축복을 하니 감사헌금 말고 또 저에게 사례한다고 봉투를 마련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셔서 병이 나았다고 고맙다고 사례를 하려하고 취업에 성공을 했다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사례를 하려고 합니다. 늘 선교지에서 주는 일로만 익숙해져 있는 선교사에게 이것은 정말 새로운 일이지요.
제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주례도 목사의 임무요, 장례집례도 목사의 임무요, 더욱이 병든자의 치유를 위한 기도도, 사업에 잘 안되어 힘들어 하는 교우의 일터를 찾아가 격려하고 기도하는 것도 목사의 임무요, 더욱이 토요일 업무시간에 하는 마땅히 목사의 직무인데 왜 엑스트라로 사례비를 받아야 하는가? 교회에서 이미 사례비를 받고 있는데,
그래서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받지 않습니다. 드리시려면 교회로 올리세요. 교회에는 이미 드렸다는 거에요. 그러면 됐습니다. 정 드리고 싶으시면 선교헌금으로 또는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선한 일에 사용하세요. 그래야 복이 임하지요. 저는 이미 가난한 ‘소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이미 받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모습에 소문이 나고 돌아 돌아서 제게 들려오는 거에요. “진짜 목사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짜 목자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내심 우쭐했습니다. “그래, 이게 목사의 길이다.” 그때에 저는 사탄이 제 마음에 틈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 우쭐해라. 그리고 교만해라 다른 목사들 정죄하라”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罪性이 이렇게 발동할 수 있구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저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제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가지고 네 義로 삼지 말아라”
오늘 마지막 절입니다. 7장 6절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 빗대어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 개에게 주지 말라.” 여기에서 ‘거룩한 것’은 곧 생명을 살리는 ‘진리의 말씀’을 말씀합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주지 마라?” 개에게 주지마라. 여기에서 개라고 하는 존재는 바로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 성경전후 맥락으로 볼 때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여 들을려고 하지 않아요. 비판과 심판과 정죄를 일삼는 그들에게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저들이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으나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외식과 교만” 사람이라면 아무도 100% 비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바리새인 수준이라면 진리의 말씀은 의미가 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슬람의 세계, 적그리스도들과 테러리스트, 가깝게는 더 북녁 땅의 인권을 무시하는 무신론자들에게 그렇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왜 진리의 말씀, 거룩한 진주, 생명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혹 나는 나만의 외식과 교만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지는 않는가? 여전히 부수고 깨뜨려야 할 내 스스로 만든 영적 장애물 때문이 아닌가?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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