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가복음11:2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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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응답받는 기도의 언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기도는 근본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말씀하지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마7:7) 한편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알아서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냥 주실 수 없으실까?” 우리가 자녀들 키우면서 “좋은 대학에만 붙어봐라 내가 뼈가 빠지게 일을 해서라도 학비 대겠다.” 이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꼭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심지어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고 성경에 보니, 그게 사실이에요. 중요한 사건과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성경전체에 여기, 저기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분명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믿는 자들 중에도 너무 많아요. 사도행전 2장 42절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떡을 뗐습니다. 교제를 나누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새벽에 우리들의 모습처럼, 성전에 모여 “더불어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랬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장하는 교회는 그처럼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하고 능력을 얻으니 세상을 뒤집어엎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이미 내 형편 다 알고 계시고, 내 속 마음까지도 다 알고 계신데, 왜 기도해야만 들어주시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해요. 그 이유는
첫째,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된 존재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고, 가진 것으로, 아는 것으로, 해 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의 구약적인 배경은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우상 신들에게 비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에 화가 나신 하나님께서 “얘야 번지 수가 잘못됐다. 내가 너를 만든 창조주다.” 그런데 아버지가 여기 계신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꾸만 엉뚱한 것 의지하고, 구하게 되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렘29:12) “내게, 내게,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강조하십니까?
성도여러분, ‘번지수’를 제대로 찾고 오직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왜 구하고 부르짖어야 응답을 주시는가? 구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데는 가식이 없어요. 아기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울어요. 울면 돼요. 그러면 어머니가 해결해 줍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문제의 해결이 어떻게 오는가? 어느 사람은 생각합니다. “많이 배우면, 해결할 수 있다. 깨닫는 자가 해결한다.”
힌두교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세 가지가 있어요. 그 첫째는, 무지를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얻을 得(득), 이를 到(도) 자를 써서 ‘得到’(득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박사의 기도는 더 빨리 들어주시고, 덜 배운 사람의 기도는 제껴놓고, 천천히 들어주시고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면 지적인 종교가 되고 말 것이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아요. 많이 못 배웠어도, 부자가 아니어도, 생긴 것이 좀 민주주의라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좀 못 받아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으니, 그저 강청하고 부르짖으면, 주께서 도우신다.”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주실 줄 믿으니까? 그렇게 간절히 구하면 주실 줄 믿으니까, 이런 진실함이 있으면 들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배운 자식, 더 많이 사랑하고, 머리가 안 좋아 덜 배운 자식은, 빌어, 먹든지 말든지,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어요. 왜, 구하고 부르짖어야 기도응답을 주시는가? 그 의지하고 구하는 자세가 진지하고, 강렬하고, 순수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 심정이 표출되는 것이 바로 기도 아니겠습니까?
저희 집에는 형제, 자매가 9남매나 되었으니, 제가 자랄 때에 별 모습이 많았습니다. 학교에 분기별로 학비를 내야 하는데, 아버님이 학비를 주셨어요. 그러면 때가 되면 아버지에게 가서 “학비 주세요.” 말을 해야 합니다. 누가 제일 빨리 잘 받아냈는가? 누가 제일 늦게 받아내서 선생님한테 말 듣고, 독촉받고 그랬는가?
형제들이 잘 알아요. 가운데 누님이 제일 잘 받아 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방법은 간단해요. 끊임없이 강청하고 요청하는 거에요. 납부일 되기 전에 미리 말하고, 그리고 납부일이 다가오면, 아버지 지갑이 열리고, 돈이 나올 때까지, 강청이 끝이 없어요. 아예, 학교를 안 가요. “잉~ 잉~ 잉~!” 하면서 안 주면 아예 학교를 안 갈 기세로 강청해요. 그러면 마지못해 주세요. 그런데 “나 그러기 싫어~!” 하는 바로 위에 형님은 매번 제일 늦게 내서 선생님한테 불려가는 거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첫째, 뭐라고 했어요. 믿음이 있어요. 그러니 내가 아니라,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서 있으니,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께 있으니, 세상의 그 어느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으며, 나갈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은 진실함의 표현이라고 했어요. 그 의지하고 구하는 자세가 진지하고, 강렬하고, 순수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에는 필수적인 기도언어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기도 중에 사용해야 할 기도의 언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 중에 하는 말은 그저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연기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향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때로 강청하여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언어가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믿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기도 언어가 필요할까요?
첫째, 분명한 소원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소원이 분명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중언부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는 많이 했는데 기도 마치고 집으로 갈 때면 내가 뭘 기도했지? 소원이 불분명해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네가 무엇을 얻기를 원하느냐?" 소경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에게 묻는 자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제게 삼천원만 도와주세요.” 혹은 “먹을 것 좀 주세요.”라고 간청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묻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니 번지 수를 제대로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외쳤던 것입니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분명한 소원의 언어로 기도하기 위하여 그림언어를 사용하면 매우 도움이 됩니다. 마음에 그림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바울이 선포했을 때에 그의 마음에는 이미 로마가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마음에 그리면서 소원을 분명히 하십시오.
기왕이면 꿈꾸는 것처럼 흑백이 아니라 컬러풀하게 그리십시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자는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A person longing for any dream for a long time resembles that dream at last.”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가절한 소원의 언어로 그림을 그리시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 성경 본문의 말씀이죠.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약속이 있는가봐~! 약속이 있대~!” 그렇게 방관하는 자세로는 약속의 말씀이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 기도는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에도 이 믿음이 보여요. “우리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요.” “그려? 그러면 당신이나 잘 믿으세요.”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려 어떻게 알어~?” “궁금하시죠? 내가 예수를 믿고 나니 내 인생이 완전히 변했어요.” 그러면 솔깃해서 어떻게 변했나 듣고 싶어 귀를 기울이겠지요.
언어는 씨앗과 같습니다. 말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언어는 믿음의 표출이요, 증거가 됩니다.
“주께서 오늘도 내 몸 안에 염증을 잡고 있는 세균들을 죽이십니다.” 몸이 아픈 자들은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로 선포하는자 임상 통계로 나왔습니다. 그 환자는 다른 환자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주께서는 반드시 감사한 일을 주실 것이다.” 믿음의 언어로 선포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축복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축복의 힘을 잘 알았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간절히 축복할 때에 장자의 축복이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야곱은 그의 인생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자녀들을 위해 차례대로 복을 빕니다. 그 축복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되었습니다.
어제도 나누었습니다. 중보기도의 응답이 제일 빠르다. 왜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 축복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십시오. 평소에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축복한다 아들아. 너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야~!” 가정의 책임자인 가장, 남편을 위해서도 축복의 기도를 하십시오. “축복합니다. 내 남편~! 항상 강건하기를 내가 축복해요.” “사랑하는 내 아내, 돕는 배필이 되어 주세요. 내가 세상 떠날 때까지 내 곁에 있어 주세요. 나 보다 더 장수하세요.”
구역장은 구역원들을 위해서, 장로님들과 저는 성도들을 위해서, 성도님들은 장로님들과 목사님을 위해서 교역자를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서로 축복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바로바로 응답해 주십니다. 교회와 가정과 일터와 나라를 위해서 축복의 언어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응답찬송: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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