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도행전3:1-1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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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규칙적인 기도는 영적인 밧데리의 충전이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그처럼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기도하는 자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그렇게 따랐어도, 그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정작 주를 만나고 고침을 받은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이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하기에는 일이 너무 많고, 너무 바빠요.” 어느 시대는 바쁘지 않았나요? 예수님 시대에는 바쁘지 않았나요?
예수님과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그 분주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상한 마음, 그러기에 눈물로 가득찬 마음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 예수님은 그 순간을 놓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예수님은 그녀를 긍휼히 여기시고 열 두해 혈루병, 그 고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기도는 그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상황 중에도 내가 주를, 그리고 주가 나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에요. 그런데 바빠서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루라도 기도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핸드폰의 밧데리를 생각하면 그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루라도 충전하지 않으면 다음날 어느 순간에 핸드폰은 죽고 맙니다. 소통은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매일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시간은 내 영혼에 생명력을 유지되도록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안 그러면 결국 영혼은 죽은 바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소통은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로 분주하고 바쁘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하여 하늘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사역을 이루신 적은 없으십니다. 언제고 싸인을 받고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새벽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현하고, 하나님의 싸인을 받고, 하루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매일 제 구시에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하여 주를 만나고자 할 때에 주께서 힘을 주시니 성전 미문 앞에 있는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켜 세울 수 능력이 부어졌습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제 구시에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가족을 불쌍히 여기사 베드로를 보내시고 그와 가족모두가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하지 않고 무시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너무 바쁘면 아예 기도를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영혼의 밧데리의 충전은 정한 시간에 하는 것이 제일 안전합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쓰임 받았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기도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무디, 루터, 조지뮬러, 존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 기독교 역사 속에 부흥의 불을 지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간을 정하여 기도의 제단을 쌓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성신학자로 유명한 앤드류 머레이는 말했습니다. “일정한 기도시간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통계는 증명합니다. 하루의 일과 중 90퍼센트는 습관에 의해 움직이고, 10퍼센트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은 무심코 규칙화된 습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죠. 미국의 저명한 컨설턴트 잭 핫지는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주장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무의식 속에 미리 프로그램 되어 있다.”
저는 집에 가면 하는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텔레비전을 켜는 것입니다. 주로 YTN이나 연합뉴스, 또는 채널A를 봅니다. 뉴스가 궁금한거죠. 텔레비전을 켜 놓고 옷을 갈아입고 물을 마시고 책을 펴 들고, 그러다가 뉴스는 혼자 돌아갑니다. 저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어제 저녁에도 그랬어요. 사업장 심방예배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저는 습관적으로 TV를 켰죠. 그런데 TV는 켜져 있고, 뉴스는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저는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니, 아내가 그래요. “왜 TV 켰는데? 보지도 않을 거면서.....? 습관적으로 TV를 켜~요.” 제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느니,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지는 안 그러나 봐라~!”여러 가지 가사일로 바쁘던 아내가, 8시30분만 되면, 정확히 그 시간이면, 영락없이, 다소곳이 소파에 앉아서는 TV를 켜요. “여름아, 부탁해~!”를 봐야 해요. 충전받는 시간이죠. 그 바쁜 와중에도 정서적으로 충전받는 시간이 8시30분이에요. 저도 곁에서 같이 충전을 받아요.
“아~! 어제는 백혈병에 걸려있는 왕금희가 주상원이랑 여행을 하다 쓰러졌는데...... 죽으면 안되는데~!”......., 오늘 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요. “그런데 어떻하죠?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네요.”! 이제 “여름아 부탁해~!” 드라마도 가을이 돼서 그런지 거의 마쳐가는데...., 그거 끝나면 어떻게 하나~?!
성도여러분, 저는 이 새벽에 “규칙적인 기도는 영적인 밧데리의 충전 시간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습관, 기도시간을 정하여, 매일같이 주를 만나는 시간을 마련해야 된다는 성경적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 ‘기도시간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쌔(1절)”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시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세 번씩(단 6:10; 시 55:17) 제3시, 제6시, 제9시(현재 시간으로는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는 성전, 회당, 그리고 자기 집 옥상 같은 곳이었어요.
오늘 성경본문의 제 9시의 기도시간은 성전에서 세 번째 기도시간으로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파트너가 되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 이 모습은 구약 시대의 제사 드리는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갑니다. 그 기도의 전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신약 교회와 구약 교회의 연계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는 차이가 있었어요. 신약교회의 지도자들은 구약 교회에서처럼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는 모습이 아니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그들의 시간을 성별하였습니다. (행 6:4).
그리고 그 장소는 성전이었어요. 신약 교회에 있어서의 '성전'은 기도하는 장소이며, 예배하는 장소이지, 구약 교회에서와 같이 제사 드리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 있어서의 건물로 된 '성전'의 개념은 다만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 21:13;사 56:7)이며, ‘예배드리는 집’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첫 번째, 교훈,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미문에 앉아 있던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역사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러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왜 굳이 성전인가? 집에서도 기도하면 되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환경’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장소로 삼았다는 얘기에요. 강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곳을 기도장소로 택했던 것입니다. 시간을 정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통하여 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여러분과 제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 새벽기도를 통하여, 시간을 정하여 하는 기도로, 그리고 기도하는 집, 바로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시므로, 하늘로부터 주가 부어주시는 능력과 은총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저는 선교지에서 24년을 보내는 동안 영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일이 있다면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는 새벽기도신앙인으로 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나가 있는 모든 선교사님들이 다 새벽제단을 쌓는 것은 아닙니다. 피곤하고 지치지요. 현지인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는 좀 다르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섬기는 교회가 불문명하지요. 그러니 어느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려야 할지 불분명합니다.
네팔에 하나밖에 없는 한인교회는 카투만두 외곽에 살고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멀기도 하지만, 새벽기도회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나간다고 해서, 그 누구도, 아무도, 볼 사람도, 말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중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지요. 영적인 감독인 담임목사님의 눈초리가 있어서, 더군다나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그러니 규칙적인 기도를 하던 모습들이, 선교지에서는 감독이 없으니,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새벽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제 곧 캄보디아로 파송을 받게 될 조덕현 목사님께도 얘기했어요. “새벽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해 나가십니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에게는 강조합니다. “일 주일에 최소한 네 번은 새벽기도회에 나오시오” 거룩한 습관, 규칙적인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러한 선교지에서 저의 상황은 좀 달랐습니다. 신학교가 있어요. 2000년도에 저와 인도 북장로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설립한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은 70여명의 학생들 중에 90프로가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결혼 안했으면 무조건 기숙사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24시간 학생들은 통제를 받는 것이에요. 새벽 4시 30분이면 모두가 일어나서 5시면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이게 참 한국식인데요. 그런데 제가 한국선교사이니까 운영이사회에서 제가 고집을 부리고 시작한 새벽기도회가 이제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기도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떻게 하루가 시작되어야 하는 지를 배웁니다. 우상과 귀신이 들끓고 있는 나라에서 교회개척자들로 훈련을 받는 저들이 집중적인 기도없이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백전백패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한편 저는 그래도 본을 보여야 하는 설립자이자 교수이기 때문에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억지로라도 참여할 때가 종종 있는데 특히 전날 몸이 지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면 그렇지요. 그런데 이 새벽기도회가 영성을 살리고 유지시킵니다.
낮에 기도한다? 어림도 없습니다. 얼마나 바쁘게 일들이 돌아갑니까? 잠시도 시간 내어 기도할 틈이 없습니다. 그저 밥 먹을 때에 하는 것뿐이에요. 새벽을 기도로 드리지 못하면 서서히 영성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시간을 정하여 주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주께로부터 하루 시작의 결재를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의 생명력의 밧데리는 매일 충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광야와 같이 거친 세상, 전쟁터와 같은 세상,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드는 영적전투의 현장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결재하시니 하루, 하루가 승리로운 삶,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새벽에도 시간을 정하여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병자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새벽으로 기도하시는 여러분에게도 그 놀라운 역사, 치유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체적으로는 고침의 역사, 영적으로는 소생의 역사, 심적으로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하며 기도합니다. 응답찬송: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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