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계시록7:9-1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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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행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한 삶의 길을 다짐하고 헌신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온 우주에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요,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대치할 수 없다” 고 하는 개인의 내적인 신앙고백을 온 몸과 마음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미네소타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베들레헴 침례교회 원로 목사님인 존 파이퍼는 이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을 내렸습니다. “예배는 한 분 진실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기뻐하는 방법으로, 찬양과 영광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또한 선교하는 교회의 목사님답게, 이 예배를 선교와 연관시켜 정의하였는데, 말씀하기를 “선교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끝난다”고 말함으로 선교사역의 목표를 아주 명쾌하게 제시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칼빈신학교 선교학 교수인 로저 그린웨이 교수는 이 예배를 가리켜 “선교의 최종적 목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근본이시기 때문에, 선교가 아닌 예배가 근본이다. 이 세대가 지나고 셀 수 없이 많은 회심자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그들의 얼굴을 숙이게 되면, 선교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 그는 선교는 단기적으로 필요한 것이라 했으며, 예배는 영원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24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했던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써,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던 선교지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마침내 자신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면, 그곳에 더 이상 선교는 필요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결국 모든 열방의 만민을 예배의 자리에 세우는 것이 선교를 해야 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주제는 천국에서도 지속될 예배와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의 말씀을 보니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저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예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선교가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 함께 나누었습니다. 나라로 나누어보면 이 세상에는 206개의 나라지만, 서로 다른 언어집단으로 나누어보면 이 세상에는 무려 24,000여 언어집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구원의 단위는 나라가 아니라 이 언어집단, 24,000 방언에서 구원받을 자를 부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방언” 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이 끝이 나고, 선교도 끝이 나고, 하늘보좌에서 예배가 드려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적어도 24,000개의 언어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나아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각기 다른 언어로 고유의 예배 방식으로,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집니까? 우리가 보낸 선교사들을 통해, 땅 끝까지 모든 족속과 수많은 방언에게 복음이 전해지니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를 숫자로 표현하자니 그 끝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144,000명이라는 숫자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12지파의 택한 백성들과 신약의 12제자로 시작되어진 모든 믿는 자들을 곱하여, 거기에 군사의 단위, 1천을 더 곱하게 되니 144,000명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이 숫자는 액면 그대로 144,000명이 아니라, 구약에서 택한 백성들과 신약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 영적 이스라엘의 후손들 전체를 상징적으로 가리켜 말씀한 것입니다.
저들이 큰 소리로 외쳐 찬송할 것입니다. 10절 말씀이지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11절에 보니 천사들도 함께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네 생물이 거기에 등장합니다. 사자와 소와 독수리와 사람,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대표성을 띤 생물이라 했으니,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은 정말 대단한 예배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2절)
이 거룩하고 거대하고 밝고 찬란한 예배의 자리에, 저도 여러분도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의 자리에 흰옷을 입은 특별한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한 장로가 사도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사도요한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14절 말씀입니다.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그때에 그 한 장로가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어찌하든지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여 가하는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또는 예기치 않은 육신의 질병과 사고의 고난 속에서도, 때로는 물질적인 압박 가운데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최선을 다해 주를 섬기며 따르는 자들......,
그러기에 때로는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야 하고, 때로는 험산준령을 넘어야 하는 험한 인생길에서, 주의 손을 꼭 잡고 종래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 그리고 마침내 천국에 입성한 자들입니다. 그 모든 수고가 인정을 받는 것은, 개인의 공력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 바로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저들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14절)
천국의 보좌, 하나님 곁,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아주 특별하고 귀한 자리에 앉게 되고, 또 하나님을 섬깁니다.(15절)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어 구원받아 천국에 가면 다 똑 같이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차이가 있기는 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특별대우를 해 주십니다.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주를 섬긴 자들에게는 하나님 곁, 특별한 자리를 주시고, 그 위에 장막을 쳐 주실 것입니다.(15절)
그때에 하나님의 위로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16절과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저 하늘나라에 당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수 샘으로 인도해주시고, 이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환란과 고난 중에 믿음을 지킨 자들의 눈물을, 그 모든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위로를 받아도 힘이 될 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하신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모든 슬픔이 그 마음에서 사라지고, 평강과 기쁨이 대신 그 자리를 가득 가득 채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위로를, 이 하나님의 위로를,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조금씩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될 일이지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남이 오히려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란 성경원어로 ‘파라클레토스’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언제 이 위로를 받습니까? 오늘 천국의 장면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상한 마음과 지친 육신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눈에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교회가 필요하고 또한 예배가 필요합니다.
필리핀에서 사역을 감당하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1990년 6월 피나투보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산속에 살던 아이타 부족은 가족을 잃고 또한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누가 저들을 위로하겠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복음을 몰라요. 그래서 저들에게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그 중에 한 마을에 복음이 없었던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제는 그 숫자가 제법 되어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당이 없으니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할 것인가?
주님께 물으며 기도할 적에 하나님은 마을 한복판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망고나무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주님께 감사하고 그 다음 주에 그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을 그 망고나무 아래로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열려 있는 예배당이고 보니 나무에는 새도 앉아 있고, 사람들은 쫓아온 개도 있고, 어느 소년의 어깨에는 애기 원숭이도 앉아서 쳐다봐요.
저들에게 찬송을 가르쳤습니다. 단순하고 쉬운 찬송, “이또 앙 아라오, 이또 앙 아라오 나가와 낭 지오스 나가와 낭 지오스 따요이 막사야 따요이 막사야 앝 뿌리힌 샤 앝 뿌리힌 샤~!”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예배당도 없이 예배가 드려지는 그곳, 망고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제 마음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니 저는 감동에 젖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화산폭발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상처난 마음에 찾아와 주셔서 이들의 주가 되 주시고 새로운 힘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 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새롭게 예수를 영접한 저들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셨습니다. 화산폭발로 인해 가족을 잃고 터전을 잃은 저들의 지치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시니 울음도 터져 나왔습니다. 찬송을 불렀습니다. “앙지오스 아이 마부띠, 앙 지오스아이 마부띠 앙 지오스아이 마부티 마부띠 사 아낀~!”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예배에는 감동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또한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새 삶으로 살게 하시는 회복이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를 영접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위로를 받은 저들은 하나님의 집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대나무와 꾸군이라고 하는 갈대지붕으로 그 마을에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찬송소리가 그 마을에, 산골짜기에 울려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으로,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환란이 그치지 않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저 하늘나라, 하늘 보좌에서 드려지는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역사가 오늘도 광야와 같은 세사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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