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로마서12:1 개역개정
-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목: 몸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
2월의 첫날입니다. 새로운 한 달의 시작을 이처럼 주님 앞에 나와 기도로 여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넘치도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챦은 것 같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만 계신 분으로 여기시면 안돼요. 물론 여기에는 그런 분들 않계시겠습니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계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불러요. 주님의 날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주님은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모든 날에 주(主)가 되십니다. 믿으십니까? 매일 매일 그분께서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셔서,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일하고, 또 주님과 더불어 안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롬1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로 너희 몸을 드리라고 합니다.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상상하면 끔찍하지요. 해석을 잘 못하면 “아니, 사람도 짐승처럼 제물로 드리는가?” 오해할 수 있어요. 이 말씀의 의미는 예배란 교회 안에서만 드리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몸을 제물로 삼아 드리는 예배, 곧 몸을 사용해서 드리는 “삶의 예배”를 일컫는 것입니다. 곧 성도는 생활의 전 부분에서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로 부르시는 소명(calling)은 얼마나 중요하고 또 귀합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나의 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일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삶의 제사’, ‘일을 통한 예배’에 꼭 성공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한 집사님은 주일날만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것이 귀하고, 그 감격이 늘 그리워요. 또한 자신의 달란트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긴다는 것이 기쁘기도 해요. 그러기에 주일인생 이예요. 다른 성도들 보기에도 참 열심 있는 믿음 좋은 성도예요. 그런데 문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고역이예요. 도대체가 일이 맘에 안들어요. 상사하고는 충돌을 해요. 하급 직원에게는 짜증을 내요.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은 둘째 치고, 하는 일 자체의 가치를 발견할 마음도 없어요. 일이란 그저 목구멍에 무엇을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생계의 수단에 불과해요.
그리고 토요일이 되면 마음이 분주해져요. “아, 내일이면 주일이구나!” “아, 내가 직장에서는 이렇지만, 그래도 내가 교회에 가면 인정받을 수 있어!”
직장 사람들은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요. “아, 저 김대리는 신앙은 참 좋은 것 같은데, 일은 잘 못해, 아, 저 김대리는 교회 일은 열심인데 도대체 회사일은 제쳐놨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분이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잘 압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 주신 노동의 임무는 세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교회의 일만 영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신앙관이 생겨났을까요? 이른바 계몽주의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선긋기”(Line drawing)에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선긋기”, 즉 분석하는 정신이 현대 기독교에 끼친 해독이 몇가지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영과 육을 완전히 나누는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서신들, 또한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당시에 이미 일어나고 있던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신앙관은 말하기를, 영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다. 선을 그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영과 육을 분리하여, 육은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다”
육체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체로 행하는 일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필요하게 영과 육에 선을 긋고 나눈 나머지, 육에 속한 모든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 하므로서 기독교 생활의 중요한 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권면합니다. “주님 뵈올 그날에 너희의 혼과 영과 몸이 흠없이 보존되기를 내가 원하노라.“
둘째로, 성과 속을(sacred/secular)을 나누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설교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고, 점심시간에 밥 먹는 일은 세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밥 먹는 것을 세속적이라고 하지 않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일의 동기와 목표의 여하에 의해서 거룩함이 결정되는 것이지 속되고 거룩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은 오늘날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책임을 망각하게 하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어요. 바로 그 집사님의 문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불필요한 담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를 넘어 세상에 있습니다. 정확히 그 세상 속에 있는 탕자들입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집안에 함께 있는 장남도 중요했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집 나간 자식을 염려하시며 기다리세요.
그래서 산돌중앙교회는 금천구 시흥대로 75길 20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본부, 센터로서의 기능이요. 실제적으로는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지체들,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산돌중앙교회의 역사를,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예배하고 교육하고 교제하는 모이는 교회요, 그와 같은 모임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영적 충전이 되면 이제는 흩어지는 교회가 됩니다. 현장이 있어요. 그곳이 바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터, 직장, 가정, 학교,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나가며 이른바 “삶의 예배”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역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성경은 지도자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만 “부르심”(Calling)“이라는, 즉 일로 부르신다는 것은 성직자나 평신도를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벧전 2:9은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개신교를 태동시킨 성경적 원리 중 하나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바로 “만인제사장”론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성도라면 다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이요,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일터에서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를 인도하는 제사장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손에만 주어져 있고, 평신도의 손에는 없었던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돌려주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성직자의 손에만 주어져 있는 사역을 어떻게 평신도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가, 또는 평신도를 어떻게 사역에 동참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선교지 현장에서는 벌써부터 이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목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마다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가 재능과 기술을 가지고 복음 전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이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은 바로 그 자리를 통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자, 주의 종, 제사장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아멘입니까?
“너희는 교회 안에서만 빛과 소금이 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는 과거에 선교지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 어느 성도님께서 입장권을 주셔서 아내와 함께 뮤지컬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해요. 임동진 장로님이 주연으로 등장했던 뮤지컬 “해상왕 장보고”를 봤어요. 지금은 목사님이시지만 그때에는 장로님이셨어요. 그 뮤지컬을 보는 동안 참 감격이 되었어요.
시대적 배경이 통일신라시대이고 보니, 불교가 왕성하던 때라 몇 번인가, 이 불교식의 제례가 드려지는 모습이 나와요. 그러니 불교의 스님들이 제례 중, 바라춤을 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뭐 그 심벌즈, 챙챙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그 소리가 아주 요란하고 뭐 정신없이 춤을 추어댑니다. 그리고 마지막 큰 굉음과 함께 모두들 부처상 앞에서 합장을 하는데, 저는 유심히 임동진 장로님을 주시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장로님인데 무대이긴 하지만 부처상 앞에서 절을 할까? 그게 궁금했어요.
그런데 아~! 그는 혼자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 내놓으라는 연예인들이 허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순간에 그는 우뚝 서 있어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아마 몇 번 더 합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했다면 그래도 그는 합장하지 않았을 것이예요.
저는 그 중에 그러한 그 임장로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에는 큰 울림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깊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아~! 역시 신앙인이구나~! 역시 장로님이구나~!” 그 당당한 모습에 저는 진정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다짐했어요.
“그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저래야 해. 어디에서든지 그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해...”
그는 그 극을 준비하면서 예술인으로서 또한 신앙인으로써 어쩌면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했는지 모릅니다. 극 중에서라도 신앙인으로서 장로님의 신분으로서, 남들이 바라보는 눈들이 있을것인데 어떻게 해야 할 까, 고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결단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 많은 관객들 앞에게 신앙인으로서 서야 할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습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려, 산 제사, 삶의 예배를 드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비단 교회안의 신자들의 모습에게 용기를 주기도 했으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에게 더 강한 무언의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그처럼 극중에서 요구하는 것을 신앙으로 거절해도........., 그를 세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 뭐래도 그 자리에 서야 할 인물이기에 감독은 그를 세워야만 했기에............., 그래야 그 뮤지컬이 빛을 발하기에 관객을 동원할 수 있기에........,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눈감아 준 것입니다.
그는 영화인으로서 연극인으로서, 그 일터로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는 그 일터의 현장에서 그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늘 동행했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까?
“주님 나로 하여금 산위의 동리가 되게 하옵소서!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존재로 누구 앞에서도 신앙인의 모습으로 서게 하셔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고지를 점령하게 하옵소서! 실력으로 인정받게 하시고,
주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내게 하옵소서!”
저는 이 새달의 첫날을 맞이하면서 이와 같은 선한 열망이, 여러분의 가슴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다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축업을 잘했던 베드윈의 조상 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를 따라서 목축업을 잘하여 삼촌 라반으로부터 신임을 받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요셉은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므로 그 형제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룹니다.
그런가 하면 애굽왕이 이스라엘 민족의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할 적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일을 하지 않은 지혜로운 산파들이 있습니다. 할 것을 하고 하지 않을 것은 하지 않은 지혜로운 산파들입니다.
모세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면 여호수아는 위대한 군인의 면모를 보이며, 가나안 땅을 정복합니다. 그런가하면 다윗, 다니엘, 오바댜, 느헤미야는 주께서 주신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을 도운 누가는 의사였으며 루디아는 자주장사, 곧 여성 사업가 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우리의 전쟁터가 아니요, 우리의 선교의 현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교의 현장, 우리가 우리 몸을 통해 산 제사로 드릴 예배의 현장은............, 교회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명하십니다. “너희는 가라” 그러나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도 주십니다. “내가 어디든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일터마다, 여러분 자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하시고,
매 주일이면 승전군이 되어, 본부이며 안식처인 교회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목청 높여 승전가를 부르시는, 2월 한달, 승리로운 한달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