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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임미해 권사 - 제암리를 다녀와서
운영자 2022-06-11 추천 0 댓글 0 조회 260

제암리를 다녀와서

49 구역장 임미해

 

 

제암리에 관해서는 가끔 역사적인 이야기로 가슴 아프게 기억되었고 충청도 어디쯤 이지 않나 생각으로만 남아있었다.

언젠가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이기에 이번 구역장 세미나에 주저없이 동참을 했다.

버스길이 좀 막혀서 짜증이 날 때쯤 나에게 익숙한 동네의 모습들이 보였다.

발안, 봉담 가는 길 …

제암리가 충청도가 아님 경기도 화성이었다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가져오게 했다

이곳은 나의 시댁의 본향이다. 발안군 양감면 요당리

제암리가 향남면이면 양감면은 바로 옆인것이다.

내가 결혼 후 아이들이 아직은 어렸을 때 시아버님께서 명절 때 우리를 데리고 이곳에 오셔서 많은 문중 가족들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아직은 집들이 옛 모습대로 있었기도 했고 개축한 곳들도 있었다. 농사를 짓고 있는 친척들도 더러 있었지만 우리 시 할아버님께서 막내이셨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자 하시면서 본인의 몫을 유산으로 미리 받아서 유학을 하고 들어와 대구은행을 창시하셨고 그래서 할머님은 그곳에서 대구 댁으로 불리었고 대구할머니라고 불리셨다고 했다.

할머님은 일찍이 머리가 좋으셨는지 독립후에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을 싼 값에 사서 양옥으로 개축하여 인테리어를 바꾸고 파시면서 많은 돈을 벌으셨고 그 돈으로 시골 친척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공부를 시키셔서 그 곳에서는 시할머니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다. 덕분에 그 동네 별명이 박사마을로 많은 박사들과 교수 학장 총장 대기업 회장들이 배출되었다.

그렇지만 정작 본인의 자녀들은 부자집에서 하고 싶은 데로 살아서 그랬는지 실패한 인생으로 사셨다. 아버님은 자신의 어머님이 이 친척들을 거의 거두신 것에 대해 자부심이 크셨다.

그리고 

이곳 제암리 유적을 볼 때 그곳 한 귀퉁이에서 양감면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할아버님께서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다 기에 우리 시댁이 친일파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조금 내면에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듣고 내면에 자부심이 생겼다.

그것은 나에게 상당히 큰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제암리가 지금은 아주 자그마한 마을로 주변이 한 참 발전가도를 달리고 있고 제암리 곁으로 큰 고가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왜소하고 작아 보였지만 그래도 다녀간 사람들이나 크리스찬들의 기부로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기도 했고 유적 안에 기념교회도 만들어져 있어서 혹시나 그때 불타버리고 없어져버린 것을 아닐까 염려했던 마음을 지울 수가 있었다.

유적지 이름은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이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이곳 몇몇 주민들이 우리도 만세운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함께 시작하여 4월 15일까지 화성의 많은 면들이 연합했는데  3월21일 동탄면을 시작으로 26일 송산면 27일 서신면 28일 성산면 사강리 29일 양감면,태장면 30일 안용면 태장면 31일 향얌면 발안리에서 시위가 확산되자 경기도 경무부를 중심으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가 편성되었고 4월1일 팔탄면 2일 장안면, 우정면, 향남면 제암리, 1차 검거반이 활동하였고 3일 장안면, 우정면 에서 시위할때 일본순사를 처단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도 일본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4일에는 향남면 발안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검거하면서 화수리를 수색하였다 5일에는 향남면 발안에서는 시위대들이 경계하면서 일본인들을 오히려 보호했다 6일 비봉면, 만세시위를 할 때 새벽에 수촌리를 포위하고 시위주도자 6명을 검거하면서 민가에 방화가 시작되었다 7일 마도면 만세시위,8일 음덕면 남양리에서 민세시위를 하고 9일에 2차 검거반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10월과 11일에 발안리 화수리등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240명을 검거하였다 14일에는 송산면 마도면 서신면의 20개 마을을 수색하고 175명을 검거하고 1202명의 서약서를 받고 훈방했다 15일에는 보병11명과 순사2명이 향남면 제암리로 이동하여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팔탄면 고주리로 넘어가서 일가족을 학살하기까지 이르렀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주민들을 교회안으로 불러 들이고 아리타 중위가 교회를 나가자 마자 세번 날카로운 구령이 들려왔고 입구에 있던 병사들이 교회당 안을 향해 총을 쏘고 교회당 바닥에 앉아있던 주민들이 뛰어 오르고 쓰러지고 하는 아수라장을 이루었지만. . ,

제암리 학살사건의 생존자인 노경태 할머니의 증언이다.

 

이때 이미 불을 질러 사람들이 뛰쳐 나오면 다 총으로 갈겨 불에 타 죽거나 총에 의해 죽거나 모두 죽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전동례 할머니는 밤중쯤 되니께 좌판이 하구 일본사람 댓 데리구 들어오더니 이렇게 나와 죽은 사람을 죄 창으로 찔러서 그렇게 해유 죽은 사람을 죽은 거를 거 무슨 죄로 창으로 찔러서 창자가 흐르게 해유 라고 증언했고 김시열 할아버지는 시체를  토막토막 난도질을 한 후 불을 놓아 시체를 구별할 수 없게끔 만들었어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면 현기증이나,

학살의 주범인 아리타에 대한 판결문은 제암리 고주리 학살 사건은 커티스 테일러 언더우드 스코필드 등의 재한 공관 기자 선교사 들에 의해 전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세계 여론이 악화되자 아리타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여론을 무마하려고 시도했다 1919년 8월21일 일제는 아리타의 학살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고 한다

1982년에서야 유해발굴이 시작되었고 불탄 유해들이 제암리에서 약 4키로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봉분도 없이 매장이 되었고 발굴시작 3일후에야 유해와 유품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나라속에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속에 속한 사람들이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펼치며 자아를 자유롭게 행복하게 펼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인생을 살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라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던 우리를 왜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을 했을까?

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것을 차지한다고 본인들이 행복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악하게 속국의 국민들을 모두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처리해야 했을까? 그런다고 더이상 외치지 않을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연하게 일어나 이러한 것들을 지켜 주기 위해 몸으로 맞서서 외치고 결국 그 모든 행위가 이나라를 독립하게 만들었으니 그 어느 누가 또 우리에게 같은 행위를 저지를 수 있을까?

결국 승리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지만 그 열매는 지금껏 우리 국민들이 우리나라를 자유함 안에서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내게 해주었다.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 하게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일을 돕는 자로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고통받는 모든이들을 돕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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