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에베소서6:1-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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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엄청난 복이 임합니다.
단순히 “내 영혼이 구원받는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단순히 “마음에 평강을 얻는다”거나 “선하게 산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 본질적인 변화, 내가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역사가 변합니다.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이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변혁시키는 것입니까? 그 바탕에는 그 기저에는 핵과 같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상적으로 보면 종교라 부르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복음!’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시대! 철학적으로 탄탄하고, 문화적으로 화려하고, 군사적으로 막강했습니다. 인간문명의 바벨탑을 쌓아 올렸어요. 오늘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지방은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타락하고, 문화적으로 퇴폐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향락주의와 관계적으로는 상전과 노예로, 착취와 굴욕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어둠의 주관자인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권세가 그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한 예로,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원치 않게 태어난 아기는 내버리고, 약하고 기형인 아이는 죽였습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를 절제력이 있고, 온화하고, 인내하는 교육가로써 묘사하는 것은 당시의 규범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어요. 로마 가정의 제일 위에는 식구들에게 주권적인 권위를 행하는 ‘가장’이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소위, ‘파트리아 포테스타스’ 가장의 특권이요, 독재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으니, 자녀 처벌권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때때로 신생아 살해, 어린이 유기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한 집안의 가장은 종이나 물건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라고 하는 성경학자는 그 시대의 아버지의 권한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종으로 팔 수도 있었고, 심지어 사슬에 묶인채 그의 밭에서 일하도록 할 수도 있었으며, 법이 그의 손안에 있었기에 제멋대로 린치를 가할 수도 있었고, 마음대로 벌을 내일 수 있었다. 심지어 자기 아이를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와 같은 악한 사회, 겉으로는 화려하나, 심령은 아니라고 해요. 마음에는 평강이 없어요. 그러니 양심은 선을 찾습니다. 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유리하는 에베소 도시의 시민들에게, 전혀 새로운 소식,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집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서, 교회에 나온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 앞에선 전도자가 전혀 새로운 인생의 도를 전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모습은 완전 혁명이에요. 기존 사회, 병든 사회를, up-side down! 완전히 뒤집어엎는 새로운 복음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외치는 내용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장 2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복종하라’ 라고 하는 단어는 그 뜻이 “섬기며 사랑하라” 에요.
이 대명제에 근거하여, 먼저는 부부관계를 언급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여기까지는 로마사회에도 맞아요. 그런데 이어가는 말씀이 “남편도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라 생명처럼 사랑하라”(28절) 이 모습은 혁명이었습니다. 당시 자기의 권력과 욕심에 따라, 여자를 재산처럼 여겨 하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이 가르침은 깜짝 놀랄만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전혀 다른 부모와 자녀 관계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말씀이죠.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여기까지는 로마사회에도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그처럼 자녀처벌의 권한을 휘두르며, 독재자와 같은 아버지에게 전하는 가르침은,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이 가르침은 죄악의 전통과 문화 속에서 자녀를 재산이나 물건처럼 여기는 그들에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찍부터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시편127편 3절에 말씀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
왜 이렇게 자녀를 귀히 여기는 것일까요? 그 생명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라고 자녀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이니, 저 로마시대, 오늘 이 말씀을 받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니, 예수께 다가오는 아이들을 제자들이 막아 설 때에, 예수께서 분노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노하신 것은 그 때뿐이었어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훈계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엡6:4) 요즘 시대 21세기에는 이런 모습이 없을까요? 자녀를 과거 로마시대의 에베소 사람들처럼, 노엽게 만드는 부모가 없을까요? 물론 달라졌습니다. 많이 달라졌어요.
그러나 여러분들도 보셨을 거에요. 유기되고 버려진 아이들, 구타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주지 않으니, 맨발로 집을 탈출해서, 슈퍼마켓에 들어와 정신없이 빵을 먹어대는 불쌍한 아이의 모습이 세간에 떠들썩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사회 속에 얼마나 감추어져 있을까요?
기독교가 아직 서양종교로 여기고 있는 네팔, 여전히 선교지이지요. 네팔에 세워진 리빙스톤 학교에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고아원에서 왔어요. 부모에게 버림 받은 것입니다. 그래도 기독교 고아원에 왔다는 것이 은혜지요. 이 ‘깔마’라고 하는 이 여학생의 언니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빚을 지고, 못 갚게 되니, 어릴 때에 남의 집에 일꾼으로 팔려갔어요. 평생 그렇게 종처럼 일꾼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그런가하면 네팔에도 결혼하지 않고 낳게 되는 사생아들이 많아요. 이 아기들은 라마불교 사원으로 보내집니다. 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는 엄마 없이 아빠 없이 그렇게 크는 것이에요. 세상에는 여전히 너무 끔찍한 일이 많아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병들어 있습니다. 죄악의 저주가 잡고 놓지를 않아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합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마음에 평강을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일은 힌두교에서 하는 요가나 초월명상이나 불교에서 하는 템플 스테이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의 능력으로, 내 영혼의 내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이에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여기에서 주의 ‘교훈’이란 단어는 ‘교양’이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방적 행위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행위, 교양을 평소에, 자라날 때에, 말로 그리고 행위로 본으로 보이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훈계로’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훈계’란 단어는 치료적 행위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원어로 ‘파이데이아’라고 하는데 그 원어의 뜻은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예방적 차원의 교훈과 치료적 차원의 훈계로 양육하라 고 했습니다. 그 교훈과 훈계는 세상적 방법이 아니라, 말씀에 보니, “주의 교훈과 훈계”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하지요. 아주 중요합니다.
영국 사람들의 조상들은 원래 바이킹, 즉, 해적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북 게르만민족으로 A.D.8,9,10세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의 템즈강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앵글로 색슨족과 함께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이들은 훌륭한 후손을 키우기 위해 고민하다가......,
훌륭한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도덕적으로 교육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 여성들을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예수를 믿었던 여성들은 억지로 끌려와서 해적들의 아내가 되었지만,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영국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래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세상 학교교육만 잘 받으면 될 것이다. 반에서 성적으로 10프로 안에만 들으면 좋은 직업을 갖고 안정되게 살 것이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확언합니다. 공부가 학업성적이....아니오. 주의 말씀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정말 후회합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세상적입니다. 성경으로 세상을 해석하지 못하면, 과거 로마시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붕괴되고, 마음은 공허하며, 영혼은 유리합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나중에 가서 다 자란 다음에 후회하게 되면 누가 책임집니까?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4절)
저는 요즈음 아가들, 아직 아가인데 사회성을 배워요. 새로운 시대의 아가들입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니,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할머니가 봐주면 너무 감사한거죠. 아직 아가인데 어린이 집에 가서 참 일찍부터 사회성을 배웁니다. 이 다음에 어떤 모습이 될까? 참 궁금합니다. 더 사회적인 경쟁사회에서 관계를 잘 맺어나가는 모습이 될까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자주 듣습니다. 어린이 집에서 하루를 다 보내고 저녁에 엄마를 보면, 화를 냅니다. 울고 땡깡을 부립니다. “나를 두고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가들이 “너 더 맛있는 것 사주고, 더 좋은 곳에 데려가고, 더 좋은 옷 입혀줄려고, 그러는 거야~! 더 좋은 학교에 보낼려고 그러는 거야~!” 과연 이해할까요?
그렇습니다. 사회가 이러합니다. 부부가 나가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장 많은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아가들은 어릴 적부터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 노여움을 갖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요. 같이 있는 시간이라도 꼭 많이 사랑해 주세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 많이 사랑해~! 정말 예뻐~!” 표현을 해주세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바톤을 이어주기 위해서, 그러므로 신앙으로 자란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에 담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할 귀한 교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능력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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