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창세기39:7-12 개역개정
-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제공: 대한성서공회
유혹을 이기는 능력
유혹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믿는 자들이라고 하여 비껴가거나 피해가지 않습니다. 늘 주변에서 맴돌며 어슬렁 거리다가 찬스가 오면 즉시로 쳐들어옵니다. 유혹의 내용은 돈, 명예, 권력, 쾌락 등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어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중에 아주 강력한 것이 성적인 유혹입니다.
유혹이라 함은 해서는 아니 될 것을 하라고, 하라고, 괜찮을 것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정도를 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들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파멸이요, 안 알려지게 되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양심을 자꾸 찔러댑니다. 그러니 후회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로 불안하여 자꾸 숨기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 정신이 건강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요셉에게 찾아온 성적 유혹과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유혹이 언제 찾아옵니까? 크게 보면 먼저 실패했을 때에 찾아옵니다. 어차피 실패한 인생, “될 대로 되라!” 자신을 지키지 않고 버리는 것입니다. 양심을 버리고 몸을 버립니다. 유혹에 지고 맙니다. 더 큰 파멸의 자리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유혹은 성공의 때에 찾아옵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경우에요. 39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창39:6)
요셉은 주인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 가정의 모든 것을 매니지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어요.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의 집입니다. 분명 성공이에요. 그런데 유혹은 이처럼 잘 될 때, 슬그머니 찾아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처럼 무명의 목동이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영토를 넓혔고 민족의 영웅이 되었어요. 그러니 “이만하면 됐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전쟁터에 부하들만 내보내고 자신은 성에 남아 나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모습이 그처럼 유혹적으로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 말씀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뭔가를 조금 성취했을 때에 “이만하면 이제 됐다!” 여길 때에 이때가 바로 유혹이 틈탈 때임을 알고 정신 바짝 차리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어떻게 지키는가? 말씀과 기도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자세로 하는 기도, 형식적인 자세로 읽은 성경, 그것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그런가하면 요셉의 용모도 한 몫을 합니다. 39장 6절 마지막 부분에 다윗의 용모를 언급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오늘날 용어로 훈남, 꽃미남, 상남자, 였던 거에요. 매력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조심해야 하겠지요. 은연중에 남을 시선을 빼앗고 있으니까요. 본의는 아닌데 남이 유혹당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지요.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가요. 어느날 아내가 남편을 전도합니다. 교회에 나가자고 합니다. 같이 갔어요.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아내가 교회를 간다고 하면 괜히 화를 내며 가지 말라는 거에요. 왜 그랬을까요? 그 교회 목사님이 너무 잘생긴 거에요. 아내는 목사님 얼굴 보고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이 벌어져요.
또 반대의 얘기가 있지요. 아내가 교회에 다니자고 해요. 남편이 따라 나섰어요. 그 교회 목사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남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요. 그리고 아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말리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목사님이 그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에요. 안심이 되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외모가 어떻든 가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 속사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변하면 겉사람은 속사람의 영성을 쫓아가는 거에요.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관능의 미’를 ‘경건의 미’로 바꾼 여인입니다. 그리하여 창녀가 성녀가 되었어요. 서양 금언에 “관능의 미는 사람을 유혹하여 이용하고자 하고, 경건의 미는 사람을 섬기고자 한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미모는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예쁘기를 바라십니까? 훈남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늘 이웃을 섬기고자 하십시오. 그러면 그 모습이 관능의 미모가 아니라 경건한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바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집요하게 유혹하였어요. 요셉이 혼자 있을 때마다 그랬어요. 성경에 보니 매일 같이 집요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유혹했습니다. 한번 두 번의 유혹은 단호히 물리치지만 반복적인 유혹은 쉽지 않겠지요. 39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39:10) “날마다” 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아예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하자고 합니다. 참 지독한 여인이에요.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우리가 요셉에게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의 곁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 어제도 함께 묵상했지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이것을 라틴어로 Coram Deo, 신전의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음을 늘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특히 남자들은 더 그래요. 주머니에 돈도 있고, 시간도 있을 때, 꼭 깨달아야 할 것은, 돈도 있고 시간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존재이신 하나님도 함께 계심을 꼭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유혹이 왔다가 도망가는 거에요.
하와가 그러지 않았나요? 하와가 남편인 아담과 떨어져 혼자 있을 때, “이때가 챤스다!” 생각하여 사단이 접근해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을 해요. 이런 상황에 제일로 중요한 것은, 그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충만했었다면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라고 했어요. 형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철저히 믿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온 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새벽에도 기도할 때 진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 계심을 온몸과 맘으로 인지합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강한 진지가 되는 것이에요. 유혹이 닥쳐와도 틈새가 없으므로 공격을 못 해요. 그저 챤스를 보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맴돌 뿐입니다.
이렇게 신전의식, 임재의식을 갖고 있는자는 유혹에 닥쳐올 때 이깁니다. 요셉이 그러했어요.
둘째,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압니다.
죄다! 죄가 아니다! 그 기준의 근거가 사람의 판단과 생각이 아니에요.
오늘날 포스트모던이즘의 세상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없어요.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졌습니다. 상대적이에요. 절대진리도 없어요. 서로 통하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조의 법칙을 저버리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역리로 사용하며....,”
이 시대에 간통법은 폐지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간음은 분명 죄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애굽, 그 사회 풍조 속에서 보디발의 아내는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 죄가 아닌지 분명히 알지를 못했어요. 그러나 요셉은 그 도덕적 기준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러니 분명했어요. 흔들리지 않았어요. “이건 죄다!” 성경본문 39장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성도 여러분! 세상 풍조에 기준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가 됩니다. 악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복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에 요셉의 행동은 다음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단호한 거절입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민하지 않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으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죄를 부르는 유혹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이에요. 39장 8절 말씀입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창39:8)
유혹은 “생각해봐~, 그렇게 거부하지만 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라고 마음을 조금씩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넘어가면 안돼요. 생각할 것이 없어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죄인데....,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순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집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을 통해 오든지 생각을 통해 오든지 성적 유혹이 계속해서 나를 사로 잡아가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네 번째 요셉의 대응입니다.
넷째, 피하는 것입니다.
39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창39:12)
유혹이 닥쳐 올 때,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붙잡고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중팔구 무너집니다. 그럴 상황 자체에 접근도 하지 말고 아예 피해버려야 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고”(10절), 그리고 함께 읽은 말씀대로 “버려두고 밖으로 나갔습니다.”(12절)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해야 할 일은 어찌하든지 해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는 발도 드려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디에 갈 때, 어디에 머물 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왜 지금 거기에 있는가?”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 하나님의 음성이 어디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심령에 울려 퍼져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신전의식으로 모든 유혹을 이겨내시는 복 된 날, 승리의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