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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21] 천국 백성의 성품: 평화를 위한 양보
운영자 2024-04-19 추천 0 댓글 0 조회 28
[성경본문] 창세기13:5-13 개역개정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천국 백성의 성품: 평화를 위한 양보

 

이 세상에는 크게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살아갑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13장에 이 세 모습이 등장하고 있어요.

 

첫째는 자연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에요.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이 양심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믿지만, 현실의 유익이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탐심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게 믿는 목적이에요. 자신이 원하는 땅을 차지한 롯의 모습 속에서 그 모습을 봅니다.

 

셋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삶의 목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러기에 주의 법도를 지키는 것으로 마음의 평강을 누리며,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세 부류의 다른 모습이 아주 분명하게 들어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나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대한 선택을 할 때, 그 인간성이 드러납니다. 과연 하나님 중심이냐? 사람중심이냐? 아니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인가?

 

위기의 순간에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쳐올 때 벌거벗은 신앙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상황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지 아니면 나부터 살고 봐야 해! 신앙의 수준이 들어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시면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어요. 십중팔구는 도망치거나 아니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제 아들은 놔두세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테스트였어요. 그 상황에서 합격하면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은총과 복으로 함께 하실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배우는 영적 교훈은 바로 이 선택의 자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각기 다른 자세로 땅을 선택합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모두의 평화를 위해 양보할 것을 양보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브람은 하나님과 벗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과 벗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벗하기를 원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성품으로 변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선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그 성품이 주를 닮아갑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서 잠시의 환난을 견디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었습니다. 거기에서 아내를 빼앗길 뻔한 더 큰 환난을 경험했어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은 믿음에 성숙하지 못한 아브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건져내셨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아브람은 무릎을 꿇었어요. 134절에 보면 그는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와, 처음 단을 쌓았던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는 회심과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철저히 변화되었습니다.

 

1213절의 말씀에 나타난 아브람의 모습은 이기적입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그러면 아내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에요. 아내라 하면 자신을 죽이고 빼앗을 것이요, 누이라 하면 더 맘 놓고 데려갈 것 아니겠어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아내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다는 거에요. 내 생명만 유지하면 된다는 거에요. 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변화하였습니다. 이제는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람도 조카인 롯도 둘 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축도 많아지고 식솔도 많아지고 그러니 비대해 졌어요. 질서가 잡히지 않고 식솔들 간에도 서로 다툽니다. 사실 그럴 수 있어요. 사람들 인생살이가 그렇습니다. 차라리 없으면 서로를 위하며 살아요. 적은 것도 서로 나눠 먹으려고 해요. 정이 더 깊어요.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내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 바뀝니다. 이는 마치 술잔이 술잔을 부르는 것과 같아요. 불길이 번져가는 것과 같습니다. 욕심이 욕심을 잉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반목이 시작되고 다툼이 시작되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가진 것으로 인해 불화와 서운함이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람과 달리 롯은 두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물이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팔레스틴 땅에서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소알 땅을 차지 했습니다. 롯의 잘못이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선택해서 가지라고 하니까 가진 것 뿐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와 상식으로 보면 잘 한 결정이에요. 똑똑한 결정이에요.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자기중심적이지요. 상대방을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모습이죠. 아브람의 양보를 자신의 찬스로 여긴 것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것을 잡고 보자!”

 

그런데 축복은 아브람에게 갑니다. 그의 성숙한 성품 때문이에요. 우리는 한 친족이라!”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13:8)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벗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평화를 택합니다. 이 땅의 보이는 것, 가질 것이 평화를 이룸에 걸림돌이 된다면 기꺼이 양보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통해 마태복음 59절에 말씀하셨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저나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는 길은 Peace Maker가 될 때,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분쟁과 다툼과 질시가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자의 역할을 감당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보통 이와 같은 역할을 하려면 자기포기, 자기부인,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해요. 그러니 사람들은 양보 않으려고 해요. 힘들어해요. 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멍청해 보여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보하고 좋은 땅을 다 준 아브람, 마음이 기뻤을까요? 아니면 허전했을까요? 조카가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허망했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고생을 함께 하며 동거동락을 해왔는데 그렇게 떠나보내고 허전해 했을까요? 여러분, 이럴 때 누가 위로해 줍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왜 찾아오시겠어요? 위로해 주시려고 찾아 오세요. 뿐만 아니라 축복하시려고 찾아오십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테스트에 합격한 거에요. 14, 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3:14~15)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3:17)

 

성도 여러분, 내가 주면, 주님은 내게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재정원리에요. 그러므로 어떠한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할 때, 늘 고려해야 할 성경적 선택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에요. 모두의 평화를 위한 나의 양보에요. 그 모습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그럼 나는? 그럼 나는? 나의 것은? 어디 있어요?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챙겨주시고 더 큰 복으로 주십니다.

 

네팔에서 신학교를 설립하고 제가 설립자로써 재정 투자 및 충당자로써 이사장의 역할을 14년간 했습니다. 학생들은 70여명의 기숙사 학교로 발전했고, 당시 졸업생들을 통해 60여개 이상의 교회가 개척되었어요.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네팔에 장로교단도 설립되었습니다. 도서실은 순수 신학 서적만으로 12천권으로 늘어났고 컴퓨터실을 통해 각 신학교의 자료들도 열람하는 최신식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신학연맹에서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는 신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학교가 되었어요.

 

이렇게 발전시키기까지 여러 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고 초창기 그 어려운 때,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족 형제들도 힘써 헌금을 하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2014년도에 14년간의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현지인에게 권한을 다 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놓고 의견이 왕왕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사장 교회가 되어 물질을 지원하는 교회 담임목사님이 그렇게 쉽게 현지인에게 이양할 수가 있느냐고 아쉬워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오랬동안 국제적인 선교단체를 섬기시는 장로님과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 분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와 같은 모습은 바람직하나 제가 알고 있는 한 선교지에서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선교사가 없습니다. 끝까지 잡고 가려고 하지 넘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왜 예가 없습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요. 연세대학교 그렇지 않습니까? 이화대학교가 그렇지 않습니까? 미국 선교사들이 벌써 그 본을 보여 주었지 않습니까? 세브란스 병원이 그렇고 전주예수병원이 그렇지 않습니까? 다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그의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음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럴 때 기꺼이 평화를 위해 양보 할 수 있었으며, 그 모습을 보시고 흡족해 하신 하나님께서 더 큰 것으로 복 주셨습니다.

 

이 삶의 실천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어진 인생여정을 살아가시고 하나님의 크신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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