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0:23-3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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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니
저는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길을 걸어도 또는 식당에 가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제 귀는 그 음악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음악이 나오면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음식을 즐겁게 먹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평을 합니다. “아~! 이 식당은 주인이 60대구먼! 70-80 노래들을 좋아해!” 선곡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나름 평가를 합니다. 감각이 있네, 없네, 거치네, 부드럽네, 음악 선곡하는 것만 들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이 와요.
그런데 알고 보니 함께 식사하는 동료들은 음악에 관심이 없음을 알게 되었어요. 제 동료 선교사가 저에게 물었어요. “아니, 밥 먹는데 저 음악 소리가 들려요?” 저는 거꾸로 물었어요. “그럼 안들려요?” “안들리면 뭐하러 레스토랑에 음악을 틀어 놓겠어요. 주인 혼자 들으려고 그러나??” ^^!
제가 유행가도 부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했는데 지금도 가끔 부릅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부르던 노래니까 저는 이 노래들을 자칭, ‘동요’라고 부릅니다. 어릴 적 4킬로 정도 되는 먼 학교 길을 걸어서 오가는 길에 들판에서 친구들과 함께 목에 힘줄이 서고 목이 쉬도록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불렀어요.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들을 다 부르고 나면 두 번째는 교회에서 배운 노래, 그것마저 다 부르고 나면, 그때부터 가사의 뜻도 모른 채 부르던 노래들이 있었어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고향의 물레방아,’ ‘고향역’ 나훈아씨 노래로부터 시작해서, 남진씨로 넘어갔어요. ‘저 푸른 초원 위에’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오기택씨의 ‘고향 무정’, 한세일씨의 ‘모정의 세월’, 최희준씨의 ‘하숙생’, 아시지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초등학생이 뭘 안다고, 인생이 기니 짧으니, 사랑이 눈물이 씨앗인지 알기는 해요? 몰라요. 그냥 멜로디가 좋아서 불렀어요, 그냥 노래니까 불렀어요.
그런데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이런 노래를 지금도 교회 안에서 흥얼거리고 다닌다든지....,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면 동창회에서 노래방에서 한 곡도 아니고 그냥 트롯트 메들리로 불러댄다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게, 목사 맞냐?” 그러겠죠?
더욱이 교회에서 새 신자들도 함께 야외로 소풍을 가서, 그렇게 제가 트롯트 뽕짝을 계속해서 불러대면, 한편 흥이 나서 좋아할지는 몰라도, 그게 덕이 되남요? “에고~! 실망스러워라! 목사님 같지도 않어~! 아예~! 가수로 나가야 했었는디~! 뭔가 잘못되었어!”
그래서 제가 그렇게 세상 유행가를 교인들 앞에서나 새 신자들 앞에서 해요? 들어봤어요? 예~! 못 들어봤어요. 왜요? 제가 안불렀으니까~! 일년에 딱 한번, 어르신들 모시고 효도관광 다녀올 때만, 딱 한곡만 불러요. 분위기 띄워드리는 거죠.
제가 이렇게 긴 얘기를 하면서 노래 얘기를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의 권면, 23절 말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
그 다음절에 뭐라 합니까?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4)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목사로서 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성도들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고 덕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한 영혼을 구하는 일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믿음이 성숙한 자로 세우는 일에,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뒤로 미루고 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무심코 행하는 행위가 있었어요. 그것은 신전에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드렸던 음식을 교인들이 먹는 것이에요. 이 음식이란 소나 양 고기 였어요. 짐승을 죽여 제물로 드렸고 이어 도축을 하여 신전 앞에서 팔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시에서 가장 신선한 고기를 사려면 신전 앞 시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상에게 먼저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사서 먹는 것, 그것은 성경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 무슨 말이에요? 신앙에 문제 될 것이 없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7장 15절~16절에 말씀하셨어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7:15~16) 이 말씀에서 “밖에서 사람에게도 들어가는 것”은 곧 먹는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어요.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7:19)
같은 맥락에서 디모데전서 4장 4절과 5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저는 네팔에서 때로 믿지 아니하는 자의 잔칫집에 초청을 받아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네팔에서 힌두교 신자들은 결혼 잔치를 하게 되면 으레 덕친칼리라고 하는 산속 신전에 가서 염소를 희생제물로 바칩니다. 신전에 있는 돌로 만든 우상 앞에서 염소의 목을 따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땅을 적십니다. 한 마디로 “신이시여, 복 주세요.” 라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그 희생제물로 드렸던 염소를 다시금 집으로 가지고 와서 잔치 음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음식을 먹을 때에 저는 속으로 생각하지요. 이 염소고기는 신전에 희생제물로 드렸을지도 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먹습니다. 양심에 꺼리지 않고 먹어요. 그런데 제가 그 음식을 앞에 두고 주인에게 묻기를, “혹시 이 염소고기 신전에 희생 제물로 드렸던 거 아닌가요?” 하고 물으면 되요? 안되요? 오늘 성경말씀은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것이에요. 27절 말씀 읽습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7)
그런데 그 주인이 종교성이 강해서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 코리언이 기독교인인데 어디 제물 음식을 먹나 안 먹나 보자” 하는 마음이 있다던지, 아니면 아예 미리 물어요. “김선생님 이 염소고기는요, 신전에 희생 제물로 신에게 바쳤던 것인데요, 기독교인인데 드셔도 되요?” 이렇게 묻는다면 먹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전10:28)
왜냐하면 판단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본문에는 29절에 그 이유를 양심의 기준으로 설명합니다. 내 양심, 남의 양심이 있다고 했어요. 여기에서 양심이란 곧 각 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잣대,” “생각의 기준” “생각의 틀”을 말합니다. 나는 먹는 것이 자유한데 상대편의 선입견, 즉 “생각의 기준”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이상한 것이에요. 갸우뚱, 갸우뚱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먹으면 그에게 덕이 안될 수도 있어요.
제가 같은 주제로 일전에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절밥이 맛있다고 제가 절간에 앉아서 밥을 맛있게 먹는다고 한다면..... 그곳의 스님들이야, 또는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은 만일 우리 교인들이 본다면, 더욱이 새신자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갸우뚱 갸우뚱!” 혼란스럽겠지요? 분명한 것은 덕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절에 승들이 그렇게 절밥을 좋아하고 잘 먹는 사람이 목사인 것을 알면 그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거리낌이 없어서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그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29절 후반부에 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절에 보니 “비방 받을 일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잠깐 생각을 하고 행동하자. 먼저 된 자가 믿음에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 결론은 처음 제시했던 23절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같은 맥락으로 말씀합니다. 32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절,“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통해 배우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먼저 된 자들로써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에 연약한 자를 든든히 세우고자 절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모습이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으로 교회와 교우를 잘 섬기시셔서 어찌하든지 많은 사람의 유익을 도모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구원을 얻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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