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전서9:19-27 개역개정
-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낮은 자리에 임하신 예수님과 같이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인생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는 먼저는 복음전하는 선교사로써 그 다음은 목회자와 신학자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순교자로써 불꽃같은 인생으로 살다 주님의 품에 안긴 하늘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믿는 자의 자유와 믿음에 연약한 자들에 대한 사려깊음과 배려, 그리고 사도바울의 사도직으로서의 권세를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니” 라고 하는 신앙에 근거하여 한 영혼 구원을 위한 사도바울의 지순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로써 당연히 요청할 수 있는 재정적 필요, 즉 전도여행과 매일의 생활에 필요한 재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나, 이 또한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우들에게 부담이 된다면 그 권한을 다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텐트를 만들어 필요한 재정을 채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재정사용 권한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모두가 다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찌하든지 한 영혼을 더 주님께로 인도하고 아직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복음 안에서 잘 자라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도바울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모습은 오늘날 주의 종들에게 신선한 도전이 됩니다. 주의 종들로 인해 기독교의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고 그래서 복음의 문이 닫힌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당회장으로서 그리고 당회의 권한을 남용하여 마치 세상 기업처럼 교회를 세습하는 모습이나, 물질이 올가미가 되어, 세상 법정에까지 가고 구설수에 오르는 부끄러운 모습들은 이 시대에 복음 전파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이제 세 번째로 자신이 스스로 포기한 자유와 권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첫째는 먹는 일에 있어서 자유함을 포기하였고, 둘째는 사도의 재정적 권한을 절제하였고, 그리고 세 번째로는 가진 권세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아래서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갖기로 한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그래서 20절로 23절까지 사도바울은 이를 실천하기 위한 자신의 행동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즉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본인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 즉 이방인들에게는, 본인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이 없는 자같이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22절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같이 읽겠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
23절에 말씀합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인데 그러한 모습이 곧 복음에 참여하는 모습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모습이라고 했어요. 전도 대상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수준에 맞춰주는 주는 것이 곧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십니까?
복음은 그러한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에요. 평강이 있는 곳에서 평강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하늘나라 천상의 영광을 마다하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 사람과 같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왕궁에 왕자로 태어나시지 아니하시고, 낮은 자들, 소외된 자들을 체휼하시기 위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그리고 누울 곳이 없어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부르는 찬송이 있어요.
“그 어리신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왜 세상이 예수님을 존경합니까? 어떻게 세상의 영웅들은 칼로도 세상을 점령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그 무엇으로 온 인류의 마음을 감동으로 젖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낮아지시는 사랑, 겸손한 사랑, 체휼하시는 사랑, 생명까지 주시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임마누엘로 우리 곁에 함께 계셔서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꼭 잡으시고 어려운 세상을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이 이 복음에 참예하기 위하여 자유와 권한과 신분을 스스로 내려 놓은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낮아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정도까지 믿음이 성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 안돼요. 왜 잘 안되겠습니까? 세상의 눈길 때문이에요. 세상의 풍조는 거꾸로 가니까요. 무시당하고 싶지 않고, 기왕이면 존중받고 싶습니다. 호텔 앞에 서는 차가 좋은 차면, 벨보이가 다가와서 문을 열어주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영접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옷차림을 보고서 물건을 파는 백화점의 점원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지 말라는 얘기 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영육간에 잘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체휼하는 것입니다. 상가집에 가면 함께 울어주고, 잔칫집에 가면 함께 웃어주고... 무슨 말씀인가하면, 내가 가진 것이 많고, 많이 배웠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만 머무르려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고 하지 말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음식만 먹으려고 하지 말고....,
그렇치 못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때로는 노무자일수도 있고 사골세 방을 전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소외되어 사랑에 목말라하고,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내일이 보이지 않아,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차라리 어린 자녀들과 함께 세상을 포기하자는 사람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제가 평생에 감사하는 것은 선교사의 삶으로 제 인생의 가장 꽃다운 시간을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감사한가 하면, 바로 이러한 낮은 자들과 함께 이웃되어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열악한 선교지에서 때로는 코리언이라고 하는 이유로 선교지의 정치인들 시장과 관료들과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할 때도 있었고, 그럴 때는 폼나게 옷을 입고 나가야 했어요. 때로는 통역관으로 한국에서 방문하는 국회 위원들과 선교지의 유엔 기관들의 임원들과 교제를 하고 식사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화산폭발로 인해 자신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들, 피난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고, 문맹율이 80프로가 넘어 글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문맹퇴치 교육을 하였고, 학교를 세워 가난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저들의 자녀들을 교육시켜 국제기관, 국제은행에 취직하게 도와주었고,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을 한국과 인도와 미국으로 유학생으로 가게 도와주었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당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교제하고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 재정적으로 돕고, 버림받은 여자아이들, 내버려 두면 인도에 팔려갈 여자아이들 열 다섯명을 딸처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대학을 나와 학교 교사가 되었고, 다섯 명의 딸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삶이 어려운 자들을 가까이 하다보면 잘 씻지 못해 냄새나고, 많이 배우지 못했으니 상대하는 나의 격이 떨어지는 느낌도 있지만, 목자라고 하는 것은 냄새나는 양을 껴안는 것입니다. 병든 양을 돌보는 것이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는 것은 험난한 곳으로 기꺼이 발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왕이면 더 좋은 곳, 더 안락한 곳, 더 편리한 곳에 안주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업그레이드가 되기를 원해요. 그러나 진짜 실력자는 누구인가? 복음을 위하여 높은 곳에도, 낮은 곳에도 갈 수 있는 능력, 이 거룩한 능력, 이 복음의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부에 처할 줄도 알고,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때로는 빈에 처할 줄도 알아, 그래서 삶의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는 영적인 실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을 쳐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 이를 Self-Leadership이라고 말합니다. 남들을 이끌고 리드하는 리더이기 이전에, 나를 제어하고, 나를 리드하고, 나를 Control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7절에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왜 버림을 받습니까?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복음으로 살지 못해서!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고, 누리려고만 하는 자는, 주께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진 것이 있으면 그 가진 것으로 섬기십시오.
높은 지위가 있다면 그 지위로 낮은 자들을 섬기십시오.
가진 권세가 있다면 그 권세로 연약한 자들을 위하십시오.
많이 배웠으면 그 배운 것으로 많이 배우지 못한 자들을 가르치시되 겸손함으로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가진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실 때에
첫째는 더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며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며
마지막으로, 주께서 여러분의 삶에 더 크신 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사시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