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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23] 선입견의 올무에서 벗어나라
운영자 2023-02-07 추천 1 댓글 0 조회 290
[성경본문] 욥기22:1-11 개역개정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선입견의 올무에서 벗어나라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오늘 22장부터 31장까지는 욥과 친구들 간의 세 번째 변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친구 중에 제일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다시금 등장하여 욥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잘못의 내용은 주로 욥이 과거에 부자였을 때, 이웃들에게 친절하지 아니하고 부당히 대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지적하는 것이에요.

 

엘리바스의 지적은 당시 사회에 통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자들의 행위에 근거한 것입니다. 실제로 욥이 그랬는가? 아니에요. 욥은 선한 사람이요, 가난하고 삶이 힘든 자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엘리바스는 그렇게 욥을 몰아 붙이는가 하면 그가 배우고 경험한 지식 때문입니다. 이를 선지식이라고 합니다.

 

그의 선지식은 인과응보의 원리였습니다. 까닭 없이 고통이 왔겠느냐? 심는대로 거두는 것 아니냐? 사람에게 고난과 고통이 오는 것은 죗값을 받는 것 아니겠냐? 그러므로 욥이 고난 겪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다.” 그러한 선지식의 전제하에 엘리바스는 당시 대부분의 부자들이 통상적으로 행했던 죄악을 주욱 열거합니다. , 너도 그 중에 한 사람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누군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그럴 것이다 지레짐작하고 싸잡아서 죄인 취급하는 모습을 도매금이라는 말을 씁니다. 바로 엘리바스가 그러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참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걸을 때 한 날때부터 소경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한 불쌍한 자를 만납니다. 그를 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2) 왜 그렇게 물었겠습니까? 통상적인 개념, 선지식, 소위 도매금으로 본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니까 맹인이 되었다.” 이 생각이 제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9:6~7)

 

예수님의 답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육신의 질고가 오는가? 지난 주간 금요기도회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다양한 근거가 있다. 성경에 근거하여 보면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기억나세요?

 

첫째, 지은 죄 때문이다. 둘째, 귀신이 들려 병 들린 경우가 있다. 셋째,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해 주시는 허락하신 연단으로 주시는 질병이 있다. 욥이 이런 경우에요. 그가 압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고백을 해요. 다음 장, 2310절 말씀에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연단으로서의 질고입니다. 저는 만일에 여러분이 질병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한다면 이런 연유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회자의 바람이죠. 이런 연단으로 오는 경우의 질병이란 결국 지나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결과는 더 좋기 때문입니다.

 

연단으로 주어진 질병이란 주께서 다시금 더 강하게 세우기 위해 허락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연단으로서의 질고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말씀했어요. 감당할 만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힘도 주시기 때문이다.” 왜 그렇겠어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린도전서 1013절에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렇게 해서 그 영성이 더 깊고 넓고 큰 주의 일꾼으로 세우시는 거에요.

 

네 번째, 질병의 원인은 사람으로써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주어지는 질병이 있다고 했습니다. 죄 때문도 아니고 연단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성경에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예수님은 고치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침을 받지 못했어요. 그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면 사도바울에게는 간질병이 있었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그가 그처럼 능력을 행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인데, 간질병으로 발작이 시작되고 온 몸에 경련이 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은혜가 되겠습니까? 통상적으로 아닌 것이에요. 그래서 그가 간절히 세 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답은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그가 받은 주의 말씀을 고백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12:9)

사도바울이 주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합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그 고치지 못하는 질병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주의 능력으로 크고 놀라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다섯 번째 질병의 원인은 육체를 잘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를 잘 관리하지 못해서, 과음, 과식, 과로, 과속, 절제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면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로 인해 그렇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몸에 해로운 광선을 받게 되니 질병에 신음하고 장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욥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는가? “죄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과응보의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네가 부자였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지적하는 부자들이 짓는 죄를 열거합니다. 6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 일련의 죄악들은 6절에는 형제를 볼모로 잡고, 헐벗은 자의 옷을 벗겼다. 그러므로 죄목이라면 무자비하게 강탈한 죄! 7절에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죄목이라면 가혹할 정도로 불친절한 죄! 8절에는 공유해야 할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죄목이라면 권세를 이용한 강도죄! 9절에는 과부와 고아를 무자비하게 학대한 죄!

 

이렇게 열거한 죄악들은 당시 부자나 권세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었던 죄악들인데 엘리바스가 지레짐작으로 욥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너도 부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았겠느냐?” 짐작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선지식, 선입견, 지레짐작, 도매금, 외모로 짐작하고, 사회 통상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내 기준을 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참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제가 한국에 들어와서 목회자 초년생으로 목사의 이미지에 대해 어느 장로님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목사!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있는가?” 그때 제 마음에는 예상하는 답이 있었어요. 물론 저의 개인적인 견해겠죠? 그것은 성경 교사 또는 영적으로 돌보는 자 였어요. 그런데 예상 밖의 답을 들었어요. 목사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의외의 답에 제가 휘청~!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가라 앉고 있는건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정치권에 나가 있는 목사도 있어요. 그 성향이 극과 극으로 극보수도 있고 극진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가 생긴 것은, 교회 안에서도, 목사가 권모술수를 사용하며 정치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 아니겠습니까? 일종의 대형교회 세습도 그런 모습 중 하나겠지요. 교인들의 대부분은 원하지 않는데도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서, 공동의회를 엉뚱한 시간에 정하고, 통과시키려는 술수들도 그런 모습 중 하나겠지요.

 

제가 그날 충격을 받고,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다짐하고 기도했습니다.

행여나 정치꾼의 모습으로 목회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게 비춰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 돌봄과 양육과 전도에 집중하는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그러므로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 성도들의 마음에 목회자 이미지에 대한, 상한 마음의 치유가 임하고, 그 마음에 목자는 양을 위하여 죽는다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이미지가 형성되게 하소서!”

또한 목사의 마음에 그려지는 성도의 모습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아, 말씀으로 잘 양육되고, 영적으로 잘 성장하여, 주의 나라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신실한 모습이게 하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엘리바스와 같이 선입견에 얽매여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갖지 말고,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중보하며 기도하며, 복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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