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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06]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운영자 2022-10-12 추천 1 댓글 0 조회 506
[성경본문] 야고보서1:26-27 개역개정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26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경건하다 생각하며 예수님 시대에 이렇게 스스로가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주로 종교적 의식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반드시 지켰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248개는 하라하는 긍정적인 것이요, 365개는 하지 마라하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첨가되어 많은 보조적인 율법적인 명령들이 추가되었는데, 안식일에 관련된 조항만 해도 39개나 되었습니다. 일하지 마라. 불을 쓰지 마라. 그럴려면 요리하지 마라. 글자를 두자 이상 쓰지 마라. 응급상황이 아니면 병자를 병원으로 옮기지 마라 등등.....,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들처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아예 식사조차 하지 마라.” 그것이 경건이라 여겼어요. 제가 어릴 적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부정탄다 그 뜻이 무엇인가하면 깨끗한 것에 더러운 것이 함께 할 수 없다. 만일 그러면 오염된다.” 그런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병자들과 죄인들의 친구요,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교제를 나누셨으며 긍휼히 여기사 치유하셨습니다.

 

경건을 추구하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이라 일컫는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정확하고도 엄격한 적용 규칙들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경건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꼭 금식해야 했습니다. 나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개인의 경건을 위한 예식은 본인 개인의 경건을 함양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손 치더라도, 주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은 뒷전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성도들이여,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주의 말씀을 알기도 잘 압니다. 그 내용을 말로도 잘 설명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오늘 말씀 26절에 보면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면 이라고 표현했어요. 말은 천상유수입니다. 잘 알고 또 잘 설명도 해요. 그런데 정작 그 알고 말하는 것을 행함으로 실천하지는 않아요. 못해요. 그러한 자는 곧 자신을 속이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 따로, 행동 따로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예식을 잘 지키고, 오늘날로 보면, 예배를 지키고, 찬송을 뜨겁게 부르고, 기도회에 참여하고, 금식을 자주해도, 삶 속에, 자기사랑을 넘어 이웃사랑으로 실천하지 못하면 그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실천이 따르는 경건, 참된 경건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그 참된 경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시고, 마음으로 느끼셨을 때, 손으로 행하셨습니다. 보시고 느끼시고 행하셨다.”

아무리 바쁜 하루의 일정에서도 혈루병으로 고생하여, 자신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여인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멈추어 서서 고쳐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0:47)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눈이 보이지 않는 바디매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에게 다가가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15:22) 그 딸의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느끼시고 예수님은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눈은 마음으로,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에구~! 불쌍해라 어쩌면 좋노~!” 이렇게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셨다면, 나는 내가 행할 수 있는 어떤 일로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참된 경건이라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27절에 말씀합니다.

 

함께 27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니라(1:27)

 

성경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세 부류로 말씀하고 있어요.

첫째, 고아들입니다. 부모 없이 자라나야 할 아이들 불쌍하지요. 둘째, 과부들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남편의 자리에서 가장의 모습으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엄마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야 합니다. 내놓고 돕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도와야 하겠지요. 셋째, 나그네 된 자들입니다. 가난해서 거처가 없는 자들, 또는 코리언 드림을 꿈꾸고 타국에서 와서 열심히 살고자 하는 자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야 합니다.

 

네팔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할 때, 저와 아내는 열다섯명의 여자아이들을 키웠습니다. 2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다 장성했지요. 네팔은 여전히 영적으로 어둡고 그래서 더 가난하고...., 딸을 낳고 키우는데, 남편이 병으로, 또는 전에 있었던 공산당 내전으로 인해 죽으면, 여자로써 의지할 곳이 없으니 다시 결혼을 해요. 그럴 때 아들은 데리고 가지만, 딸은 시댁에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니, 친척에게 맡기던지 안되면 고아원으로 보내는 거에요. 그때 인도로 팔려가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그들의 미래는 너무 어두운 것입니다.

 

저희가 키우는 아이들 중에는 아직 어린 세 살정도의 아가도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침대에 누우면, 다가와서 아이들이 정이 그리우니까,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그리우니까, 아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손을 만지고, 발을 만지고, 떠나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엄마! 엄마!” 라고 부르는데, 옆에 좀 큰 애는 뭔가 알쟎아요.

엄마 아니야. 할머니야!” 우리가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거든요. 놔두고 한국에 갈 때도 있고, 안식년에 못 데려가니까, 그러면 또 다시 엄마를 잃어버린다는 느낌을 가질 것 같아서,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 관계가 좋겠다 하여 그렇게 부르게 했어요.

 

그러면 작은 아이는 울면서 아니야 아니야, 엄마야! 우리 엄마야!” 그러면서 자꾸 물어요. 엄마지? 엄마지? 우리 엄마지?” 그 모습을 보면 제 눈에도 눈물이 나요.

 

이제는 다 장성해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중에 룻이라는 아이는 커서 지방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는데, 제 아내가 들어오면 결혼식을 한다고, 계속해서 날짜 조정을 하다가 어제 결혼식을 했어요. 저와 아내가 가 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대신 결혼선물로 지난번에 아내가 네팔에 들어갈 때 이불을 사가지고 들어가서 전해주었고 며칠전 송금을 해서 살림 밑천으로 커다란 냉장고를 사줬어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 필요로 하는 사람들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주실 때, 마음에 감동이 임할 때, 주 께서 주시는 마음이구나!”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선한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니 그 마음을 잘 지키라고 했어요. 그것이 곧 세속에 물들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어요. 27절 후반부에 말씀합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사랑 없어 각박한 세상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잘 산다고 하는데 정작 과거에 없었던 독고사는 늘어가며, 사람 간에 따스함은 사라지고, 냉냉함이 더 해 갑니다.

 

교회는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 하겠지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에게도 주의 사랑을 나눠야 하겠지요. 그것이 전도요, 선교요, 구제요, 봉사입니다.

 

그러나 언제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례와 법도를 행할 때, 내 힘, 내 의지, 내 능력으로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십시오. 그 사랑이, 그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을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실천도 가능합니다.

이 새벽에도 우리가 기도합니다. 주 앞에 기도하시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사랑과 은혜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지키시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를 기쁘시게 하고, 이 풍조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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