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갈라디아서1:1-1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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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참 복음과 다른복음
갈라디아서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쓴 서신이에요. 받는 자는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입니다. 전체가 6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짧아요. 그런데 서신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서신의 뉘앙스, 즉 분위기는 그렇게 친근한 어조로 쓰인 글이 아니에요. 쉽게 생각하면 사도바울이 화가 나 있어요. 나무라는 어조가 배어나옵니다. 왜 화가 나 있는가하면 그렇게 열심히 복음으로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영접시키고, 교회를 개척하고, 구원의 참 진리를 전하고 가르쳐 놓았는데, 그래서 이젠 됐다싶어, 사도바울이 다른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러 간 사이에,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와서 엉뚱한 가르침으로, 갈라디아 교회 교우들을 현혹하는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이 분별력 없이 그 가르침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화나지요?
제가 필리핀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 영접시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충분하다 싶어, 새로운 지역, 복음화가 1프로 미만인 나라인 네팔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는데, 만일에...., 필리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진리라고 가르치고, 또 그 가르침이 좋다고 성도들이 쫓아갔다하면,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예,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아실거에요. 오늘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사도바울의 마음이 딱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른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어요. 그런데 그들이 전하는 바는 사도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도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은 유대인처럼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곧 구원을 얻는 길이라 여겼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음의 방편으로 지키는 많은 율법조항들을 따라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요, 심지어는 그들이 행하는 할례까지 받으면서, 그것을 구원의 증표처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유대인 교사들이 강조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복음이 아니라, 여전히 외적으로 들어나는 행위, 즉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율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이에요. 그런데 이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없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다, 지키다, 못 지키면, “에고~! 힘들어. 나는 다 지킬 수가 없어~!” 인간의 무능과 그 무능이 원죄로 말미암은 죄성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니 대신, “하나님 긍휼이 여겨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하고 자신이 다 지키지 못하는 연약함, 그 죄성을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그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속제물로 드렸어요.
그런데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들은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율법을 더욱 철저히 지켜야 해~!” 그래서 율법을 강조하였으니 얼마만큼 강조하였는가하면, 율법 자체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강조했습니다. 율법자체를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왜 필요하겠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 귀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제물로 보내시고, 그 보혈의 은혜로 죄인들을 구원받게 하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처사에요.
그런데 왜 이 갈라디아 지방에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수고하며 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진리의 복음이, 이렇게 쉽게, 다시금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서게 된 것일까요? 사도바울도 의아해 했습니다. 6절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1:6) 그렇게 속히 떠나서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 참 이상하다하고 의아하게 여깁니다.
세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로 돌아선 이방인들을 다시금 유대교로 불러들이기 위한 유대 교사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유대교 회당이 많았습니다. 유대교 신앙을 따르고자 이방인들이 그 회당의 회원이 되었어요.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을 지키면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 사람들을 다 해방시키고,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시기심이 날 수 밖에요.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하겠다하는 마음에 열심을 낸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교회의 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도들은 이방 세계에 대한 문화적인 이질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어요.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지켜오던 율법들을 지키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할례도 받고, 정결예식도 하고, 피째 고기를 먹지 않고, 목매단 짐승의 고기도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이 경건을 이루는 전통이요, 문화이니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 지방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했던 할례운동을 방치했습니다.
셋째,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 엄격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할례를 받으므로, 마치 구원의 증표처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는 한번 개종하면 해야 할 것이 단계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믿음 단계의 계단을 밟아가야 해요. 그래서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마치 구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목표를 정하고, 성취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이야~!” 하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선행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신앙단계의 문서를 만들고, “이것을 지켜라. 저것을 지켜라.” 체크하고, 평가하고, “틀렸다. 다시 해라.” 그런 어떤 옥죄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선호하는 자들에게는 싱겁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이단에 가까운 어떤 극보수적인 교회는 11시 정각이면 예배당 문을 닫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합니다. 아주 칼이죠. 그 정해진 시간에 늦으면 예배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의 말씀처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엄격한 규제가 사람들을 더 종교적인 사람들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얼마 이상의 헌금을 해야만 십사만사천명의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신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헌금을 마련하고 지키면서, 마치 내가 구원받은 것처럼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당시의 상황적 배경을 알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 이렇게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 중에 생각하기를,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지 않느냐?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 아니겠느냐?”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은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느냐? 이방신의 제단에 올린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하지 않느냐? 이러저러한 유대교에서 강조하는 것들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뭐라 말하지 않고 긍정적이지 않느냐?”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로마천주교와 개신교의 다른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로마를 통해 온 세상으로 확산되었지만,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권세에 걸맞게 더 웅장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급기야는 신도들에게 죄가 없어진다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전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이신칭의’ 진리는 희석되어졌고, “구원을 어떻게 얻는가?” 하나님의 은혜 플러스 인간의 공덕을 통해 얻는다고 가르쳤으니 전혀 다른 복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없는 가르침인 성모 마리아를 중보자로 소개하고, 그 앞에서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에, “아니다! 복음은 그게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다시금 돌아가자” 하고 일으킨 운동이 종교개혁입니다. 성경에 모델로 보여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6절과 7절에 ‘다른복음’ 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7) 이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이란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들을 다시금 율법주의에 구원의 근거를 둔 유대교로 돌아가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사도바울이 과격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8절과 9절 후반 절에 두 번씩이나, 그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 지어다.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흐리게 하는 그들로부터 어찌하든지 성도를 지키고자 하는 영혼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발로입니다.
그러면 참 복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음성)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렇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니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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