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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해 02] 복음 전하는 자의 본분
운영자 2021-11-30 추천 0 댓글 0 조회 575
[성경본문] 데살로니가전서2:1-12 개역개정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복음 전하는 자의 본분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대하는 말씀의 주제는 복음 전하는 자의 본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개인적으로 저의 삶의 본이 됩니다. 감히 따라갈 수가 없지요.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예수님을 롤모델로 삼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神性(신성)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본성이 아닙니다.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먹을 것이 없어 저들이 가는 길에 기진하여 죽을까 하노라 긍휼히 여기시고, 신적인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권능이 저에게는 없어요.

 

그러므로 온전히 인간의 성정으로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놀라운 역사를 행한 선교사 바울, 목회자 바울, 신학자 바울, 그리고 순교자 바울은 저의 표상이요, 표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새벽에도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의 모습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의 모습이요, 애정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사랑이 한국교회에 남아 있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영적 침체기를 겪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존경받아야 하고, 그러기에 대접받으려고 하는 성경에 없는 목회자의 표상이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오늘 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만 보더라도 사도바울의 교우 사랑에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그 주님을 닮은 사랑 앞에 바울을 끌어안고 울고, 그의 떠나는 길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종이 경험하였습니다.

 

저와 아내가 필리핀에서 7년 사역을 마치고 떠나게 될 때에 송별예배를 장자교회라 할 수 있는 까왁교회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전하는 설교는 듣지 않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성도들을 보면서 제가 말씀을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강단 앞에 서 있는 저와 아내와 해나와 왕규, 저희 앞에 한 가정씩 앞으로 나와서 인사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목이 메어 인사말이 나오지 않는 성도들은 그저 저와 아내를 안고, 그리고 해나와 왕규를 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의 찍은 빛바랜 사진이 지금도 제 오래된 앨범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거의 작별 인사가 끝나갈 무렵 예배당의 앞쪽 문이 열리며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형제가 뛰어 들어왔는데, 그곳 까왁 교회로부터 40킬로미터가 떨어진 호수 건너편 산속 마을 나반이라고 하는 마을의 촌장인 우딱이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저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하는데 저도 울고 성도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알고 보니 김선교사님 가족이 떠난다고 하는데, 자신의 마을에는 오지 않고, 까왁교회에서 송별식을 한다고 하니, 이 촌장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호수를 건너고 먼 길을 달려서, 40킬로의 거리를 뛰어 온 것이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고름이 흐르고 심한 악취를 풍기던 그의 딸의 정강이가, 제가 기도하고 건네준 연고를 바르면서, 한 주안에 마르고 딱지가 생기고 말갛게 낫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놀라우신 치유하심이었지요. 촌장인 그가 자신들의 마을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구제주로 믿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의 마을에 집단개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그들 스스로, 제가 한 요청에 따라, 산에서 베어온 대나무와 나무로 교회를 짓고, 지붕은 꾸군이라고 하는 산 억새풀로 엮어 얹고서, 예배당을 지어 헌당했던 험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인 아뽀 마말야리를 떠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 놀랍고 감동적인 역사였죠.

 

그러니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를 끌어나고 저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한 것이 아닌데 성령님께서 하신 일인데.....!” 생각하면서, “내가 떠나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저는 앞으로 10년 후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은퇴하여 담임목사의 자리를 내려놓고 산돌중앙교회를 떠날 때에, 과연 그러한 감동이 있을 것인가? 저는 네팔을 떠나 올 때에 일부러 송별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필리핀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보니, 그런 자리가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어요.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데, 제가 그리고 아내가 너무 부각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전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은혜의 자리에 들어온 자들을 사랑하였습니까?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살전2:2)

 

뭐라고 말씀합니까?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어떤 능욕이었습니까?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 들인 소녀의 몸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구원케 한 이유로 바울과 실라가 고발을 당하였어요.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옷 벗김을 당하고 많이 맞은 후에 발에 차꼬로 채워진 채로 햇볕이 들지 않는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깊은 감옥에서 한 밤 중에 찬송을 부를 때에,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들이 다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놀라고 두려워 자결하려는 그 감옥의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와 온 집안식구가 예수를 믿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빌립보지방을 떠나 그 다음 전도지로 향했으니 그 전도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데살로니가 지방이며, 개척된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사도바울은 언제고 당당했습니다. 아쉬워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사람에 연연하여, 좀 더 가진 자,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자에게 연연하여 성도를 대하는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모습이 주의 종의 자세겠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6절에는 또 뭐라고 고백합니까?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살전2:6)

 

이 기준을 잊어버리면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묶입니다. 성도들에게 휘둘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대할 때에 차별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고관들과 시간을 보내려하지만, 정작 삶이 곤고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피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이 시대에 영혼의 구원을 위해 수고해야 할 주의 종의 모습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8절과 9절에도 그려집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살전2:8~9)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고 했습니다. 새로 개척된 교회에 성도가 많아야, 그리고 헌금을 해야, 목사님의 생계를 위한 헌금이 들어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안 되니 사도바울과 실라가 일을 하면서, 텐트를 만들어 팔고 그 수익으로 생계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선교지에서의 교회개척이 다 그렇지요. 성탄절이 다가오면 선교사는 재정적으로 더 어려워집니다. 제자훈련을 마치고 교회개척을 한 형제들의 가정이 들어오는 헌금이 있어야 하는데 늘 어렵지요. 저와 아내는 부활절과 성탄절이 되면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평소에 들어가는 선교비의 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수고하는 형제들과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데 그래서 보너스를 주고 싶은데 어렵지요.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교회에서 성탄절이면 선교사 가정을 위해 보내주시는 성탄 상여금이 있어서 교회를 개척한 형제들과 나눌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닭이라도 사서 요리해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져가 도울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 목회를 하니 많이 달라요. 추석과 성탄절이 되면 성도님들께서 선물을 보내주시고 섬겨주세요. 사는 것이 저보다 어려우신 분이 많은데 감사하지만 한편 많이 송구하지요.

 

그런데 어제도 아내와 그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작년에 100만원을 네팔에 신학교에 보내어 어려운 가운데 성탄절을 맞이하는 교수들의 가정을 도왔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신학교 학장이 멧세지를 보내온 거에요. 금년에도 성탄선물을 고대하고 있다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와 얘기하고 결심했지요. 그래, 어떻게 해서든, 올해에도 보내줘야지!”

 

성도 여러분, 내가 도울 수 있으면 감사한 것입니다. 도울 수 있어서 감사한 것이에요. 주는 자의 마음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한남노회에 한 목사님이 두 달 전에 저에게 웃으며 얘기하는 거에요. 목사님, 제가 교회 개척한 이후로 지난달에 처음으로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아니, 언제 교회개척을 시작했는데요?” “6년 됐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어떻게 생활을 하셨어요?”

 

알고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목재를 다루는 재능이 있어서, 교회를 개척하고서 빨리 부흥이 안되니, 성도들의 헌금은 겨우 교회월세를 충당하고, 당신의 생활비는 직접 벌어가며 전도를 하고 목회를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건축 업체가 교회 내부 리모델링 건이 있을 때마다, 이 목사님을 불러 주는 거에요. 그래서 가서 일하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그 목사님의 모습에 제가 많이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 목사님을 돕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인생으로 살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그대로지요. 복음을 전하고, 어찌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꾼으로 세우는 것이 주의 종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2:11~12)

 

너희를 부르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하기 위하여 그 수고를 마다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며 존경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주의 종은 성도를 자녀와 같이 사랑으로 대하여 말씀으로 가르쳐 주의 신실한 일꾼들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목을 껴안고 우는 성도의 눈물(20:37)이 있어야 교회는 은혜스럽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목장이 되어집니다. 아울러 맡겨주신 자기 양들을 위해 흘리는 목자의 사랑의 눈물(20:19)이 있어야, 오늘 본문과 같은 바울의 목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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