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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07] 나의 아픔을 가져가시는 대제사장 예수님
운영자 2021-05-27 추천 2 댓글 0 조회 797
[성경본문] 히브리서4:14-16 개역개정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나의 아픔을 가져가시는 대제사장 예수님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선택받은 백성들의 올바른 삶,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직분,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세 가지 직분을 대하게 됩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왕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니 중보자라고도 부릅니다.

 

이 세 직분은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의 직속 종이니,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로 그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똑바로 살아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기쁨이요, 보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했구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모습은 마치 못난 자녀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사랑으로 희생으로 헌신하는 어머니요, 아버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중보자 된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은 언제고 높여야 할 존재가 명령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종의 직분을 가졌다고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이용해, 하나님대신, 자신이 높아지려 하거나, 자신이 인기를 차지하려 하거나, 자신의 명예와 영달을 이루려하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중보자의 자리는 참 두렵고 떨리는 자리입니다.

 

제가 이 내용을 알게 된 것은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습니다. 주의 종의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중보자의 자리구나!” “평생토록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니~!” “괜히 이 길에 들어섰나?” “나야 그렇다치고, 미래에 내 자녀가 그리고 내 아내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한동안 고민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예수님의 삶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로써, 자신의 영달이 아닌 죄로 죽을 인류구원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제물되신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구원이 임하였으며, 그 사명 감당하신 후에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으신 자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주시고, 승천하셨을 때에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신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예수님의 제사장되심에 대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4절은 말씀하기를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인류를 위해 제사장직과 선지자직과 왕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셨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가 어떻게 다를까요? 비교를 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제사장은 죄인을 위로하며,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축복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인을 훈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꾸중하며 감독합니다. 둘 다 꼭 필요합니다. 집안의 모습으로 보면 제사장은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선지자는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본문은 예수님의 제사장적 역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우리 모두가 큰 위안과 격려를 받습니다. 15절에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 고 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의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십니까?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지요. 높고 높은 천상을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위에 내려오실 때에,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그렇죠? 배고프실 몸, 지치실 몸, 다치실 몸, 아픔을 느끼실 몸, 시공간의 초월을 받으실 몸..., 그러므로 함께 동거하시고, 체휼하시고, 슬플 때에 함께 눈물 흘리시고, 아플때에 고쳐주시고, 배고플 때에 먹이시는 제사장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늘 그러셨나요? 때로는 선지자의 역할로도 감당하셨으니 성전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제물로 쓸 짐승을 팔고, 환전을 하여 이윤을 취하는 자들을 바라보실 때에, 성전은 만인이 기도하시는 집이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 호통을 치시고, 상을 뒤 엎으시고, 노끈을 휘두르시며, 저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는 모습은 바로 선지자의 모습이셨습니다.

 

그런가하면 겉으로는 거룩한척하나 교만하여 백성들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과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성전세로 수탈을 하고, 제물로 바칠 짐승을 팔아 이윤을 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호통 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5~26)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지저....” “화 있을진저...”

 

선지자의 역할로 예수님은 가식과 위선과 잘못을 냉철하고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23:37~38) 죄악에 쌓여 무너질 예루살렘성을 미리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왜 제사장이 필요했을까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한 이래로 인간은 줄곧 죄의 속박 아래서 고통당해 왔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을 위해 속죄의 방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별된 제사장을 통해 속죄 제물을 드리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제물이 필요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의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생명 대 생명이란 개념을 가지고 내 생명대신 짐승의 생명으로 내 죄 사함을 받는다 고 여겨 짐승 피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셔서, 그렇게 하라 , 진정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실 예수님 오시기 전 까지, “그렇게 하라일종의 임시방편으로 그 방법을 알려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중보의 직임을 맡은 제사장 또한 범죄하기 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 직무는 완전할 수 없었어요.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리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제물이 그렇지 않습니까?

 

제물은 짐승의 피였습니다. 완전치 못한 제물의 피를 의지해야 했습니다.(참조:16:2-15;10:1-4). 반면에 우리 예수님은 흠과 티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인간들과 똑같은 성정을 입고 계신 참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편에서나 인간 편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속죄 제물이 되실 수 있으셨으며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자격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람과 똑 같은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시기엔 실로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제사장이 되셔서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그 고통을 감내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모든 죄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왕으로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지금도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변함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 인생과 똑 같은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함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어찌하든지 선하게 살려고, 믿음을 지키며 살려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자 몸부림치지만 또 넘어지고 또 주저앉는 모습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 새벽에도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할 때 주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어제로 그동안 세분의 여성도님과 한분의 남성도님의 비상기도제목의 응답을 하나님께서 다 해 주셨습니다. 제가 마음이 많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기도제목은 계속해서 오겠지요. 그래도 산을 넘고 또 넘어갑니다. 넘고나면 내리막길이 행복합니다.

 

세분의 여성도님은 육신의 질고로 인한 검사의 결과요, 한분 남성도님은 사업체에서 겪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후1240분에 이런 연락을 해 왔어요. 목사님, 지금 법원 앞에 왔습니다. 기도드리며 담대하게 다녀오겠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계속 기도해왔는데 집중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 뒤에 다시금 답이 왔습니다. 목사님 기도덕분에 제가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시금 태어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갈 생각입니다. 오늘도 함께 동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눈물로 주의 도움을 구할 때마다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마지막 절 16절이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으로 보여주십니다.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16)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셔서 중보자로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와 은총을 입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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