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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월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운영자 2020-09-01 추천 0 댓글 0 조회 536
[성경본문] 시편23:1-4 개역개정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구약성경 시편에 기록된 150편의 시편 중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고 애송되는 시가 있다면 바로 오늘 우리가 대하는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마다 느낌과 해석이 다를 수 있겠으나, 시편 23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공급하심과 높이심이라는

어떤 인생에게도 꼭 필요한 요소를 한 눈에 그릴 수 있도록, 그리고 또 느낄 수 있도록, 생생한 그림언어와 어조로 아름답고 평화롭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살고 있으며,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해도, 건강하고, 잘났어도, 설혹 좋은 가정배경을 갖고 태어난다고 해도, 결국 어느 누구도, 여차하면 빠지게 될 함정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며, 나는 빠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오늘 성경에 비유로 나타내는 양과 같이, 꼴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존재요, 더욱이 자체 방어능력이 없으니,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세파라고 하는 야수에게 공격당하고, 상하고 찢길 존재가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자신감이 충만하여 자신의 인생을 연약한 양으로 표현하는 것이 한편 자존심 상하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목숨의 위협 앞에 서면 큰 소리 칠자가 없습니다. 급박하고 절실한 상황이 되면 그 상황의 호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다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아무리 잘 살아도 병원은 더 늘어나고 있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래도 여전히 병실은 부족한 모습만 보아도 인간의 건강과 장수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져도 찾아올 암병이 오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장수를 하고자 아무리 애를 써도 인생 수명 100년을 보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가는 길은 우리 인생의 창조주요, 주인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목자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고 그가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고, 그 감동과 감사함으로 주신 계명을 지켜 행할 때에야 복 있는 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평안과 안식,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1절에 보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2절에 설명합니다.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만족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만족은 없습니다. 양들은 쉽게 마음편히 누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디 양이 누워있는 그림이나 사진 보신적이 있나요? 없어요. 풀을 뜯으면서도 불안합니다. 야수가 언제 출현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늘 서 있지요.

그런데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목자가 곁에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지켜 보호하시니 배부르게 먹는 것이 다가 아니라 심령의 평강, 그 평간을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내용을 다윗만 안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평강과 연관하여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전도서 222절과 23절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여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고 살면 먹을 것을 얻을 것입니다. 좋은 차, , 가구, 맛있는 음식, 가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령의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배는 부른데 푸른 초장에 편히 누워 쉴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솔로몬은 그의 경험을 통해 고백합니다. 잠언 10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수고한 대로 부유케 하시나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니...., 그러니 어떻게 하십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2)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의 모습으로 해석하면 풀도 잘 먹게 하시고, 물도 먹게 하시고, 또한 눕고 쉬게 하시니 다시금 힘을 얻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영적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목적은 여기에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고 표현합니다. 이 시대의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는 의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치권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만,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이게 뭐 유식한 한자성어가 아이에요.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의의 기준이 자기자신, 인간인 것입니다.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으면서 정말 문제인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잘못이라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찔림이 없어요.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基準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있다면 자기 자신이 기준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지요.

 

절대진리도 없고 절대기준도 없다고 하는 이 세상 풍조,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 합니다. 한 단체나 공동체가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진리가 진리라면 힌두교의 베다경도 진리이고 이슬람의 코란 도 진리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진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 성경만이 진리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것이지, 사람의 사색과 경험의 작품이 아닌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사색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그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에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고 했습니다. 의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되, 주의 길을 걸으며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고, 공부를 많이 해서 학자가 되고, 건강하여 질병이 없고, 좋은 집, 좋은 차,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다해도....., 주님 안에서, 말씀이 기준이 되고, 의의 길을 걸으며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상 사람은 그 기준이 자신이라고 했어요.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나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기준이 섭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기준이에요. 어떻게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아멘~! 예수님을 모시면 인생이 잘 되면서도 의의 길로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는 책임이 있습니다. 양들을 잘 키워야 털과 젖을 얻습니다. 다윗은 그 책임을 어릴적부터 잘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양도 아니고 아비의 양을 칠 때에, 형들을 대신하여 양을 지키고 먹였어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양들에게 풀을 먹이려면 멀리 나가야 합니다. 초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동이 많습니다. 풀을 먹이고 나면 물을 먹여야 합니다. 광야에서 물을 먹이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때로 협곡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협곡 바닥에 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협곡이라 좁고 깊어 햇볕이 닿지 못하니 대낮에도 어둡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하면서 양치는 자들이 부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서 본 적이 있습니다. 깊은 협곡 아래로 물이 흐릅니다. 정말 어둡습니다.

 

물이 귀한 곳이니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갈 때에 긴장해야 합니다.

어두우니 야수가 그곳에서 어린양들을 물어가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양들을 지킬 수 있었는가를....,

 

사자의 이빨에서 양을 지키고, 곰의 발톱에서 양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각오하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물맷돌이 있고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습니다. 지팡이는 양들을 치기 위한 것입니다. 물맷돌과 막대기는 공격용입니다. 양들은 물을 먹고 있고 다윗은 주변을 살핍니다. 멀리서 야수가 접근할 때에는 물맷돌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래도 가까이 오면 막대기를 던질 것입니다. 결국 양들에게 필요한 물을 먹이고 그 골짜기를 빠져 나갈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다윗은 안도의 숨을 쉬며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윗은 양들의 목자요,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곤고한 날이지요. 들어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살다보니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고로, 질병으로, 자녀의 문제로, 사업의 문제로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어느 누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그러합니다. 때때로 모험을 불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어느새 들어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살아계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긴장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한 목자로 믿고 따를 때에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목자 되신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해 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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