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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맞이 특새5] 십자가 영성
운영자 2020-04-10 추천 1 댓글 0 조회 787
[성경본문] 고린도전서2:1-5 개역개정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 영성

 

은혜라는 말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면,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 고린도전서 22절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 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고 선교사로 나가게 만든, 영감, 감동, inspiration, 그 동기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 뒤에 있는 세계 지도입니까? 선교하는 교회니까 세계를 가슴에 품으라고,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땅 끝을 바라보라고 이렇게 큰 지도가 걸려 있어요. 그런데 이 지도를 볼 때마다 여러분 가슴이 두근거립니까? 정말 가슴이 벅차고 두근거립니까? 나도 세계선교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겠다.” 그러면 너무 감사하지요.

 

그러나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 십자가 위에서 날 위해,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생명을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지고, 그 사랑이 나에게 감동으로 살아날 때에, 비로소 선교도 있는 것입니다. 그 감동이 우리 가슴에서 식어지면, 모든 일은 억지가 되는 것이에요, 습관이 되고, 매너리즘에 빠져서 결국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성경본문은 고린도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22절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고 고백하며 서신을 쓰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이끌고 있는 성경교사들과, 저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성도들이, 생명력 잃었음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알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생명력을 잃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 도시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 때문입니다. 고린도의 주민들은 헬라 철학적 사변에 능숙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1절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이라고 했습니다. 화려한 수사학, 철학적 웅변에 익숙해진 자들이 교회의 교사들이 되었어요. 그 말과 논리에 반하여 사람들은 모여 들었어요. 그런데 정작 그 멧세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들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져 있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 수많은 설교들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니라 그저 강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사라졌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에는 언제고 복음의 진수인,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영광은 결코 오지 않았습니다. 왜 기독교는 십자가가 그 상징이 되었을까요?

 

11억 천만의 신도가 있는 이슬람교는 그 상징이 초승달과 별입니다. 밤하늘에 뜨는 초승달은 무슬림 신도들이 단식을 시작할 때 뜹니다. 그리고 마무리할 때 또 떠요. 그래서 그 초승달은 알라신이 보여주시는 표로 믿었습니다.

윤회론을 믿는 불교는 굴러가는 바퀴, 한자로 대승, 또는 소승 이라는 큰 바퀴와 작은 바퀴의 모습과, 또는 돈다는 면에서 흡사한 자를 심볼로 내세웠습니다.

 

그런가하면 9억명이 넘는 신도가 있는 힌두교는 심볼로 한 글자인 자를 사용합니다. ~!’ 이들은 믿기를 태초에 천지창조가 시작될 때에 제일 먼저 울려 퍼진 신의 음성이 있었으니 그 소리가 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살인독가스 사건으로 한때 근심을 샀던 옴 진리회가 바로 이 음성을 사용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이와 같은 상징들은 저들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원래 그 모습이 사형틀입니다. 가장 처참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형틀, 흉악범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죄인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고통과 아픔으로 아주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처형의 틀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흉측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어요.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장식으로 사용하고, 십자가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거기에 치장을 합니다. 보석을 박고, 금으로 칠하고, 벽에도 걸고, 목에도 걸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변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주는 본래의 의미를 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고난, 그 고통, 그 아픔, 그 희생은 사랑으로 승화되었어요. 죽기까지 나를 위해 희생하며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십자가는 기독교 정신을 보여주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해요. 그저 예수님께서 달려 죽으신 곳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다시금 가슴에 새겨야만 할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내 죄가 얼마나 컸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바로 여러분과 제가 달렸어야 했을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그곳에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것이에요.

 

부활절 칸타타 중에 증인들의 고백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중에 바라바의 고백이 있어요. 바라바는 흉악한 범죄자였어요. 그래서 십자가의 처형을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자, 예수를 풀어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를 따라서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 주랴?” 빌라도는 군중들이 당연히 바라바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할 줄 알았습니다. 바라바는 당대의 흉악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결국 바라바는 얼떨결에 놓임을 받았어요. 바라바는 군중들에게 떠밀려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예수를 바라보며 바라바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대체 저 사람이 누구요? 저 사람은 무슨 큰 죄를 진 것이요?”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대답합니다. 나도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모르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저 사람은 당신이 달렸어야 할 바로 저 십자가에서 당신 대신 처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요.”

 

여러분도, 저도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저 십가가에 내가 달렸어야 했었는데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훨씬 더 심한 영원한 형벌을 받았어야 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구나! 우리가 그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랑 실천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최고의 죄목에 해당되는 십자가의 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을 증명하는 것이에요. 이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우리는 결혼식에서 부부가 되기 위하여 사랑의 상징으로 반지를 교환합니다. 반지를 교환할 때에 미국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These rings are the outward visible sign of the inward and invisible love. (이 반지는 마음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외적으로 보여주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고는 부부는 그 사랑의 상징인 반지를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저도 결혼한 이후로 지난 32년간 이 결혼반지를 늘 손에 끼고 있어요. 어제가 32주년 결혼기념일이었어요. 그래서 반지를 다시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생각은 이것은 사랑의 증표야!” 평소 반지를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지요. 그런데 지금은 안그러지만...., 지난 과거에 서로 말다툼을 심하게 하고나면 반지를 빼어 놨었어요. 그 반지를 까치눈을 하고서는 째려보았어요. ~! 그리고는 화가 풀리면 다시금 끼웠어요.! 성숙하지 못해서 그랬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무한한 사랑이, 가장 구체적인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귀하게 여깁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반지를 볼 때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듯이, 우리들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화목 시켜 주는 화해의 다리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로마서 3:23)

 

죄로 인하여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은 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강에 다리를 놓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다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십자가의 다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숭상합니다. 사람들이 소를 신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이유가 있어요. 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우유를 공급하여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고, 또 사람이 죽었을 때에 큰 강을 건너서 열반의 나라로 가야 하는데, 그 죽음의 강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이러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인간도 혼자의 힘으로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데, 어찌 소가 인간을 영생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소처럼 힘이 센 인간이 있다면, 혼자의 힘으로 영생에 이르는 강을 헤엄쳐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성도 여러분, 영생은 인간의 힘이나, 재주나, 능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놓아 주신 십자가 다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다리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넷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역전극을 보여주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밖은 자들은 십자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예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완전히 반전을 이루어 내십니다. 역전극을 펼치세요.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

하나님의 이러한 역전극은 십자가의 믿음을 갖고 있는 모든 성도들의 삶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 13:4)”

 

저는 선교지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살던 곳이 아시아 최고 빈민국인 네팔이었으니 이에 비교하여 고국의 모습은 너무 훌륭했습니다. 잘 발달된 교통수단, KTX의 위용과 스피드, 잘 정리된 자동차 도로, 말쑥한 용모의 사람들, 맛깔 나는 음식들, 일들은 또 얼마나 신속히 처리되는지, 너무 좋아 보였어요.

 

그러나 이제 43개월을 살아왔는데 그 속에 그늘진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세상이 보입니다. 그 가운데 죄악이 보이기 시작하고, 풍요속의 빈곤이 보이고, 불평과 불만, 도무지 좁혀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빈부의 격차, 청년들의 취업난, 편리지향주의 여기에 휩쓸려가는 젊은이들, 인륜을 포기하고 편하고자 아예 자녀를 갖기를 포기하고, 과거에 자신의 부모님들이 헌신으로 고생하며 자신들을 키운 것은 생각도 못해요. 아니 안하려는지 모르지요. 고생하기 싫습니다.

 

그런데 제일 가슴 아픈 일은...... 전쟁터와 같은 세상 속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처럼 심적으로 영적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다시금 일어서지 못한 채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 불안과 우울증세로 유리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어제 하루만 해도 37명이 스스로 생명을 끊고, 오늘이라고 다를 바가 없어요. 오늘 우리 한국 사회는 37분에 한명이 스스로 생명을 끊습니다. 그 자살률이 OECD국가 중 두배로, 따블로 1위입니다. 경악할 일이에요.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무엇보다 가슴아픈 것은 10대~30대 사망 원인 중, 자살로 인한 사망이 가장 높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잘 못된 것입니까? 왜 이리 약해진 것입니까? 힘이 없어요. 힘이 없어서 그래요. 

 

지난 주에도 한 마음 여린 사람이 목숨을 끊었어요. 그 발단은 N번방 사건, 박사방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가, 이제 조사가 시작되었고, 그 이름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니, 그 불안감, 수치감, 죄책감이 못이겨 생명을 끊고 말은 것입니다.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저가 진작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이 사람이 진작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십자가의 고난과 승리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그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죄책감을 가졌어도 주 앞에 나와 회개하면 그 마음의 짐을 날려 버리시고 용서하실 것을 알았을텐데.....,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공중권세 잡은 사단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늘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너무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니 세상은 죄악이 가득하고, 인생은 너무 약합니다. 강한 것 같으나 그렇치 못해요. 유혹으로부터 이를 물리칠만한 힘이 없어요. 물질의 유혹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어요. 간음의 유혹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어요. 쾌락의 유혹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어요. 죄악에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어요. 유혹에 눈이 어두워 빠진거 알아도, 그 유혹을 뿌리치고 뛰쳐나올 힘이 없어요.

 

이 힘을 어디에서 구합니까? 내 능력으로 가능한 거에요? 어림도 없어요. 내가 병들었는데, 감염이 되어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스스로 병을 고쳐요? 힘이 필요해요. 이 힘은, 이 힘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 하도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이... 내 마음에 감동으로 임할 때에, 그때에 비로소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불법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죄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비로소 나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은 성금요일이니 십자가를 더 깊이 더 많이 묵상하시겠으나, 성도 여러분, 하루에 단 10분 만이라도 좋아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 날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보세요. 감동이 오지 않겠습니까?

 

나 같은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를 살리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물고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죽어주신 그 사랑, 그 은혜......! 감격이 되지 않겠어요?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보인단 말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다시금 살립니다. 힘이 납니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와요. 십자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지금도 역전의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고난주간의 가장 정점인 성 금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이제 말씀 드린 이러한 귀한 의미들이 항상 새롭게 깨달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 위로 받고, 새 힘과 능력을 얻으며, 참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응답송: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첫째로, 우리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들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참으로 크구나!

셋째로,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화목 시켜 주는 화해의 다리입니다.

넷째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역전극을 보여주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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