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열왕기상17:8-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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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고난 중에도 순종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고난주간 중, 세 번째 날인, 오늘 수요일은, 예수님께서 시몬에 집에 초대받으셔서 식사 하셨습니다. 그 때에 한 여인이 찾아왔어요. 향유 한 옥합을 열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이, 이제 곧 있게 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모습이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그 여인의 행한 일도 기억되리라” 고 예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부어드려, 아름다운 향기가 온 세상에 진동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매일 새벽,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고난을 이겨내는 성경속의 인물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물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고난과는 감히 비교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지심으로, 우리에게는 평화를 주시는 것이요, 또한 나음을 주시는 것이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인가? 고난이 닥쳐와도 굴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가? 승리할 수 있는가? 성경의 고난당하는 인물들을 통해 깨닫고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또 한 사람, 고난과 슬픔에 쌓인 한 인생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남편을 여윈 여인이었어요. 그 여인은 어린 자녀와 함께 살았습니다. 때는 참으로 어려운 때였습니다. 혹독한 가뭄이 3년이나 지속되니, 밭에서 소출이 끊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요. 그러니 서민들은 굶어죽을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여인과 아들도 마찬가지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절망입니다.
이와 같이 혹독한 가뭄이 오게 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의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16장 30절 이하에 잘 드러납니다. 30절과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나라 임금이 그의 아내와 우상을 섬기니 순진한 백성들은 저절로 따르겠지요. 그러니 나라 전체가 고난 중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정부는 몸에 있어서 마치 머리와 같습니다. 온 몸을 제어할 생각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국가정책 아니겠습니까? 작금에 불어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러한 고난에서 정부가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국민이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다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간에 총선이 있습니다. 정말 기도하고 심사숙고하여 나라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일꾼을 우리가 뽑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족속의 종교와 문화를 따라 세상으로 가버린 왕과 백성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써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을 향하여 무서운 선포를 했습니다. 17장 1절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
이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입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천수답으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비는 농사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또한 낮과 밤의 기온차이로 인해 밤에 내리는 이슬은 광야에 매일 같이 새 풀로 돋아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야 양들도 염소도 매일같이 밤사이 내린 이슬을 머금고 매일 돋아나오는 풀을 뜯어 먹으며 생존하겠지요. 그런데 “수년간 비도 이슬도 멈출 것이다” 라고 하니, 정말 큰 일 났습니다.
저들은 잘못 믿고 있었어요. 신앙관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비와 이슬이 내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그의 배우자 아세라 신의 은총 때문이다.”
그러나 어림도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창조주가 되시고,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바알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허수아비와 같은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증명해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 예언에 아합왕과 이세벨이 놀랍니다. 크게 노합니다. 노여워하여 이 엘리야 선지자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이고자 하겠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생명을 보존하시고자 “너는 숨어라” 고 말씀하십니다. 17장 2절과 3절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의 창조자가 되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육신의 보존자가 되십니다. 엘리야에게 요단강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먹고 삽니까? “그 시냇물을 마시고, 먹을 것은 까마귀를 통해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약속대로 그렇게 하셨어요. 엘리야의 생명을 지켜 보호하시기 위해, 까마귀를 통해 고기를 가져오게 하셔서 먹게 하시니,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엘리야로 하여금 확실히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날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아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혹독한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 속에 있는 백성들 중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자들은 사회 빈민층에 속한 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빈민층은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과 레위인이었습니다. 이 계층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들 계층 중에 한 사람, 남편이 없이, 아들과 함께 살고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사르밧 과부’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시냇물도 말랐습니다. 엘리야가 마실 물이 없습니다. 주의 종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로 이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십니다. 엘리야가 좋아했을까요? “왜 하필 힘든 가정에 나를 보내시는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과연 내게 줄 음식은 있는 집인가? 그럴 능력이 있을 것인가?
그러니 엘리야 선지자가 “물을 가져다 달라” 그 여인에게 말하고서는 순종하는 그녀에게 추가로 요청합니다. “떡도 가져오라” 떡은 이스라엘에서 주식입니다. 그러니 “밥도 주시요” 그런 말이죠. 왜 엘리야가 그렇게 했을까요? “과연 내가 이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는 여인의 집에 거하며 이 가뭄의 때를 날 수 있겠는가?” “필요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어디 보자” 그런 생각도 했을 법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야의 요청을 들은 이 여인은 그 가난과 어려운 삶속에 참고 있었던 설움이 터져 나옵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입니까?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요. 소출이 없으니 당연히 먹을 것이 없어요. 더 이상 먹을 것이라고는 곡식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거 먹으면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굶어 죽어야 하는 신세인 것입니다.
저는 이 시대에 이런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니 바로 북한이 떠올랐습니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 에르베 베르우셀 대변인이 로이터 통신을 통해 말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만성적인 식량 부족 사태를 겪고 있으며 영양실조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북한 인구의 거의 40%에 해당하는 1000만명 이상이 영양실조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먹을 것이 없고 깨끗한 물이 없어 병들어 죽어가는 저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작금에 사태로 인해, 아니 그 이전부터 국가의 경제가 힘들어지니, 사업적으로 죽을 지경에 이른 소상공업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직장에서 졸지에 직업을 잃어버린 많은 실직자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왜 이런 국가적 어려움이 오는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보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역에 도덕이 무너지고, 이웃간에 사랑이 사라지고, 세속에 젖어 신앙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사렙다 여인의 상황을 보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두려워 하지말라 남은 가루로 작은 떡을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떡을 만들라”
한편으로 냉정한 것 같지만 엘리야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을 선지자는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미 이 불쌍한 여인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도우실 것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는 최소한의 믿음을 요구하고 계셨던 것이에요. 만일 이 여인이 엘리야의 요청에 거절하고 떡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순종합니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모험을 불사할 때가 찾아옵니다. 극한 상황에서 생명을 거는 서원기도 같은 것입니다. “주여~! 이제 나에게는 누구를 의지할 자도 없습니다. 주의 도우심이 없으면 내가 죽습니다. 내가 부양할 내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 모습은 마치 벼랑에서 몸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폭풍우처럼 찾아온 육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완치가 된 줄로 알았는데 다시금 재발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사업이 가라앉아 부도의 먹장구름이 뒤덮을 때에, 뜻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여, 수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짙은 절망의 그늘이 드리울 때에....,
이 여인은 떡을 한번 해 먹고 죽느냐, 아니면, 주의 종, 선지자 엘리야의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따르느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 약속의 말씀대로 통의 곡물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란 평소에 잘 몰라요. 그러나 극한 상황에 가 보면 판명 지어집니다. 평안할 때에는 평안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닥쳐옵니다. 사업이 부도를 맞고, 건강은 악화됩니다. 자녀는 제 멋대로입니다.
이 상태에서 누구나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해결이 안 되고 여러 날 불면의 밤이 지속되면....,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든지 “하나님은 날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시나봐!” 믿음에서 멀어져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축복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큰 시련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산 너머 산, 우리 인생이 그러합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병들어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졌습니다.(17절) 이렇게 되면 완전 절망이지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왔겠습니까?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겠어요? 그 상황에서 믿음으로 일어나기란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 죽은 아들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을 것입니다.
원망이 화살이 엉뚱하게 엘리야에게 향합니다. 엘리야는 거룩한 주의 종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지 못해요. 그러니 자신이 죄 값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여깁니다. 주의 종을 보내어 심판하신다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차라리 안왔더라면....!” 그런 원망이지요.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 여인이 스스로 깨닫습니다. 죄를 범했어요. 그래서 이 환란이 오나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지은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학자는 말하기를 “간음의 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기에 심판이 임한 것이다” 라고 말하며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화를 근거로 해석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저는 이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 여인을 사랑하심은 주의 종,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서 아들을 달라하여 자신이 거하는 다락에 올라갑니다. 침상에 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 아픈 상황을 체휼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제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아~! 이 모습이 주의 종의 자세구나~! 아픈 성도들, 삶의 저 바닥에까지 내려가 주저앉은 성도들을 대하는 주의 종의 자세구나~!” 나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생각이 되어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엘리야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왜 죽게 하셨습니까?”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 저가 울부짖으며 간청합니다. 말씀에 보니 그 아이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이 특이한 모습은 이러한 것입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둬가시고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므로 이 아들을 살려주시고 이 가정의 슬픔이 물러가게 하옵소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의 종은 성도의 아픔을 볼 때에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아뢰어야 하겠구나~!”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시는 한이 있더라도 이 고통으로부터 성도를 건져 주옵소서~!”
성도 여러분, 이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나를 죽이시고 인류를 구원하소서” “내가 징계를 받겠습니다. 대신 저들에게는 평화를 주옵소서~! 내가 대신 채찍을 맞겠습니다. 대신 저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낫게 하옵소서~!” 주의 종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하나님께서 결국 이 여인의 아들을 다시금 살려 주십니다. 고난의 종결입니다.
이제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응답찬송: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이 여인의 환란과 역경이 물러가고 위기는 극복이 되었습니다. 그 혹독한 가뭄에서도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제일 감사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구나!” 그 영적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금 소망 중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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