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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7] 세상의 빛과 소금
운영자 2019-12-20 추천 2 댓글 0 조회 855
[성경본문] 마태복음5:1-16 개역개정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세상의 빛과 소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곁의 산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설교 장소였어요. 우리 주 예수님은 설교하기에 좋은 시설을 제공받지 못하셨습니다. 그에게는 머리 둘 곳도 없으셨으니, 설교할 만한 장소는 더욱이 없었던 것이었어요. 그러나 비록 산 위라 할 지라도 그곳은 예수님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더 없이 훌륭한 강단이 되었습니다.

 

그가 산 위 한 자리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나아왔어요. 이어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 나아와 앉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기다렸어요.

그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백성들의 추구해야 할 하늘나라의 백성의 자질을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 숨을 고르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때에 그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내가 소금이라고...아니 내가 빛이라고?"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최고의 칭찬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감히...!!"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예요. 왜냐하면 소금, 그것은 당시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한 것이어서 살아가는 동안 없어서는 아니되는 아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라틴 문학에 소금이란 단어와 연관되어 반복되는 싯구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씌어져 있어요. "Nol Utilius Sole at Sale." 뜻은 이러합니다.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 왜 시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시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소금이 갖는 그 유용성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첫째, 소금은 순결의 상징이다.” 흰백색의 반짝이는 결정체,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고귀하게 생각되어지는 하늘의 태양 그리고 땅의 바다의 작품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어떠한 인간의 인위적인 방법이나 인위적인 맛을 가미한 생산제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양과 바다 즉, 자연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순결하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이 소금을 귀히 여겼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에 이 소금을 제물로 드리곤 했습니다.

 

둘째로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사실이죠. 고기나 생선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서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 짠기는 쉽게 고기가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능력이 있었어요.

 

셋째로 맛을 내는 그 기능 때문에 소금을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죠. 소금을 넣지 않는 곰탕을 생각해보세요. 맛이 있을까? 소금 없이 삼계탕을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죠? 소금은 음식의 맛을 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는 소금과 같아야 된다는 말씀인데요, 진정한 제자란 어떠한 존재인가? 절대로 변질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같이 강한 믿음과 순결한 삶으로 사는 존재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어요.

빛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빛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어요. 구약성경에 빛이라고 하는 단어는 수도 없이 반복됩니다. 구약에만 135번이나 나와요.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경우, 빛은 하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시편 27:1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The Lord is my Light and my salvation-whom shall I fear?"

 

두 번째로 많은 경우 빛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 이니이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깜깜한 어두움 속에 빛과 같아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세파에 휘둘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 할 때에 "이리로 가라!" 하시고 갈 길을 보여주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빛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5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는 세상의 빛이로다."

 

이와 같은 성경의 해석들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빛이란 인간을 향해서 사용될 언어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 이는 신성한 것, Divinity, 즉 하나님을 상징했으며,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가리켜 소금과 빛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을까요? 이 최고의 찬사를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 안에서 빛이란 단어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서 어떻게 부족한 인간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을 빛으로 표현한 적은 모세오경에도 없습니다. 역사서에도 없고 시가서에도 없어요. 인간을 빛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지서인 이사야에서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서 49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며 이사야를 이방의 빛을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으로 대조해보면 좀 더 그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I will also make you a light for the Gentiles."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이사야를 빛으로 만들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사야를 빛으로 만들려고 하셨는가? 이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빛으로 만들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 같은 성경구절에 나타납니다. 아주 명확해요. 그것은 바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왜 하나님은 이사야를 빛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는가? 구원의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사야를 빛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는 땅 끝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명을 주기기 위해 이사야를 빛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뜻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믿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자로 부르셨다. 라는 것이예요. 믿습니까?

 

그 범위는 가깝게는 이웃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요, 멀게는 땅 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이란 어떠한 지역의 범위를 넘어서서 곧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인 이유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빛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써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아야 하고,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어두운 곳을 밝히는 빛처럼 불의에 대하여 개혁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그는 결코 팔레스틴 밖으로 나가신 적이 없으셨어요. 북쪽 끝으로는 변화사건이 있었던 헐몬산이었고 남쪽으로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거리가 그렇게 넓지 않았어요. 비교를 해보자면 남북한의 강원도 땅을 합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고 땅 끝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땅 끝이겠습니? 그곳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라고 명령하시며 복음을 전하라는 그 사명을 위임하셨어요.

 

제자들은 신실히 그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빛의 역할 즉, 자신이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여 비추며, 구원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드레는 북쪽으로 나아가 오늘날의 스웨덴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나아갔습니다. 도마는 동으로 남인도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당시 세계의 센터인 로마에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진정 빛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들을 왜 빛이라 부르셨는지 그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그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 뜻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세상 속에 살아가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구원의 소식, Good News! 福音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빛과 소금과 같이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5053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3. 온 세상 위하여 주 은혜 임하니/ 주 예수 이름 힘입어 이 복음 전하자/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해도/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기도 힘쓰리/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 되리라/ 세상 모든 사람 다 듣고 그 사랑 알도록/

 

어제는 성탄맞이 특별심방을 했습니다. 오늘도 이어집니다. 우리교회 한 권사님의 시모님이 요양원에 계세요. 저희가 갔는데 아직 권사님이 안 오셔서 그 안에 앉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 계신 할머니들, 스물 아홉분이 계신다고 했어요. 제가 놀란 것은 하나같이 밝고 맑은 표정으로 서로 담소하며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김장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에요.

가만히 살펴보니 벽에 성경구절들이 써 있어요. 기독교인이 운영하시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분위기가 좋구나~!” 참 감사했어요.

 

제 마음에 감동이 되었어요. 인생의 느지막한 때에 이와 같은 곳에서 복음을 듣겠구나!” “다음단계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것인데 천국복음으로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어찌하든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마치고 원장님을 뵙게 되었어요. 인상이 선하신 여자 분이셨어요. 제가 봉투를 준비해서 드렸습니다. 원장님,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이곳에 계신 할머니들과 함께 뭐라도 사서 나누세요.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당황하시는 표정으로 말씀하기를, 방문하는 목사님이 이렇게 주신 경우는 없었는데.....” 에고~! 그런 말씀은 안하셔도 좋을텐데..., 제가 좀 당황스러웠고 제 손이 부끄러웠지요. 그게 목사님 야단치는 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목사고....,

 

그러면서 성탄절에 어르신 섬길 때에 사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알았어요. 그 곳에서 중추적으로 일하시는 남자분이 계신데 장로님이세요. 늘 말씀으로 기도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신다고 했습니다.

 

요양원을 나오는데 제 마음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에요. 함께 간 김경재목사님, 문민자전도사님도 마찬가지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씨가 추워도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 질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내 안에 계신 빛 때문이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가 드러나시고, 우리는 통로가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추위 중에도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이 모습으로, 주를 따르는 제자의 모습으로, 승리로운 인생, 복된 삶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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