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열왕기상2:5-9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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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7.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8.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리더로 세우는 처단 그리고 등용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안 다윗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크게 보면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의해서 세워진 택한 백성의 나라 이스라엘이 강성하게 잘 보존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새로운 왕이 되었으니 반대세력에 흔들림 없이 왕다운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의 유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아직 연소했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3:7) 역사가에 의하면 솔로몬의 그때 나이가 12살 또는 14살이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직 연소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이제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다윗의 가장 큰 바람이 그것이었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왕상2:3)
대장부가 되기 위하여 꼭 해야 할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그것은 수직적인 관계요, 둘째 그것은 수평적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하면 결국 대장부가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를 잘 세워나갈 왕이 될 것이었어요.
수직적인 관계는 바로 대신관계,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수직적인 관계를 위한 유언의 내용을 어제 우리가 함께 나누었습니다. 3절과 4절 말씀에 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지라”
4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왕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늘 가슴에 두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그러므로 율법을 잘 지키면, 나라가 계속해서 견고히 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자신 있게 확신을 가지고 유언으로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먼저는 믿음, 둘째는 실천, 셋째는 결과, 즉 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확신을 가지고, 결과를 가지고, 간증하시므로, 자녀들에게 전하시고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유언 순위, Zero 순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영적인 관계, 수직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나와의 풍성한 관계가 정립이 되고나면 이제 중요한 것이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이 수평적인 관계는 곧 대인관계, 즉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직 연소한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왕이 되었습니다.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왕이 되었지만 새로운 왕이니, 백성들에게 왕으로써의 위엄과 권세가 필요합니다. 왕권이 든든히 서야 하는데 다윗이 해결하지 못하고 가는 부분이 있어요. 그 일을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당부합니다.
인사에 관한 것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인재를 곁에 두어야 일이 이루어집니다.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있는가하면, 함께 있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의 이 수평적 관계, 인간경영도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곁에 두지 않는 것이요, 또 하나는 곁에 두고 세워가는 것입니다.
첫째, 처단해야 할 인물들이 있습니다. 5절에 나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입니다. 그를 죽이라고 합니다. 8절에 보니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있습니다. 그도 처단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들이 있습니다.
둘째, 세우고 등용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7절에 보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입니다. 저들에게 은총을 베풀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인사정책은 단순히 누군가가 다윗에게 잘못해서, 그래서 밉고, 감정적 충돌에 의해서, 같은 편이 아니라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 근거하여 인사정책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이 시대였습니다. 노아 시대의 율법이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피는 피로 대응하고 살인한 자는 사형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출 21장 14절에 말씀합니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같은 내용으로 민수기 35장 16절 이하 19절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수기 35장 33절과 34절에 말씀하기를 모살자를 방치해 두면 온 나라가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니 피를 흘린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다고 아주 엄중한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규정은 왕도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어요. 그런데 같은 동족 이스라엘의 두 군대 사령관인 아브넬과 아마사를 살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으니 그가 요압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저가 또한 솔로몬의 반대편에 서서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는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다윗은 율법대로 그의 죽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다윗의 이러한 유언은 단순히 그를 괴롭혔던 사람에 대한 끓어오르는 보복심의 결과가 아니라 곧 율법의 실천이었습니다.
“살인자와 훼방자들”을 하나님의 율법대로 처리하지 못한 다윗은 왕으로서의 의무를 여호와께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 “요압과 시므이를 처단하라” 그렇게 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전과 솔로몬의 왕의 권좌를 위해서 유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 때로 두려움에 떱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때로 실수로라도 잘못을 범하고, 또 때로는 의도적으로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 유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 구약의 칼 같은 율법이 적용된다면 저를 포함하여 이 자리에 의인으로 남아 있을 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두렵지요. 그런데 긍휼이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시기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 대신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면 우리를 모는 불의 가운데에서 깨끗게 하실것이요” (요1서 1:9)
그러면 율법시대가 아닌 이 용서를 강조하는 은혜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인사관리를 하고 도대체 어디까지 그 선을 정하고 사람을 고용하든지, 아니면 퇴출시켜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 기준을 성경은 신실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Integrity 라고 합니다. 솔직한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진실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 잣대가 됩니다. 실력, 능력, 추진력, 일을 성사시키는 능력, 그 이전에 이 신실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골로새서 3장 22절에 말씀합니다.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미국과 같은 선진국가에서는 이 신실성은 기본입니다. 그러니 지켜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능력이 앞섭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신실성은 둘째입니다.
제가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제 아이들을 키워오면서 이 부분에 대하여 늘 신중했습니다. 아들을 키우면서 제가 두 번 때렸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회초리로 그리고 중학교 때에는 각목으로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두 번 다 거짓말 했을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직 아들이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그 모습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의 삶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내가 네팔에서 학교를 운영하면서 신학교를 포함하여 약 80명의 직원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고용은 주로 아내가 하지만 해고를 하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남자니까요. 남존여비가 여전한 그 사회에서 자칫 제 아내에게 해코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회를 소집해서 회의를 하고 법적으로 타당한 이유에 근거하여 해고를 합니다만 저의 판단이 항상 우선순위입니다. 많은 사람이 등용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해고되었습니다.
다른 왠만한 것은 참고 용서하고 경고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신실성에서 어긋나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한두번은 모르고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각되지요. 거짓말, 속임수, 물질적인 면에서 그렇고, 교사로써, 또 교수로써 학업성취도를 측정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하지 못하면 그 자신만 아니라 그 학교전체가 피해를 입습니다. 학교의 기강이 무너집니다. 세상도 그러면 안되는데 기독교학교에서 그러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학교를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책임자의 자리에 저와 아내가 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신학생들이 여러 명이 가방 싸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이유보다 시험 볼 때에 커닝하다 발각되면 여지없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사람의 눈을 속이고, 어떻게 주의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집으로 보냅니다. 그 학생이 섬기는 교회에 목사님께 부탁했습니다. 일년동안 다시 잘 지도하고 가르치시고 관찰하시고 변화가 오고 개선이 되면 추천서와 함께 다시금 저희 신학교로 보내주세요. 그래서 돌아온 학생들도 여러명이 됩니다. 아직 저들이 자라는 나이 20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0이 넘으면 그 성품이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성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뭔 큰일을 통해서라도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변화시키시겠지요.
말씀을 맺습니다.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요압은 자기가 행한 행위의 보상을 피로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언젠가는 거두게 된다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삶을 살므로, 좋은 씨를 뿌려야 하고 좋은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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