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사기10:1-9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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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이 시대의 우상들
우리가 사사기를 읽어나가면서 배우고 깨닫는 가장 큰 영적 교훈은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제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으로 강조된 것처럼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는 말씀에서 이미 하나님은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어나가면서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신다는 것을 그처럼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그리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그 무엇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 우상숭배의 사슬을 끊어 내지를 못하는 모습이에요. 그럴 적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심판하셨습니다. 주변의 족속들을 통해 침략 당하게 하셨고 압제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또 다시 고통과 환란 속에서 울부짖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면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차마 저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사사를 세워 군사를 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다시금 평화를 회복시키십니다.
이 내용이 계속 반복되어져 가는 것이 사사시대의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참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영적 교훈은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입니다. “나는 주님만 섬겨야지. 우상섬기지 말아야지!”입니다. 정말 하나님 한분만을 여러분 삶과 생명의 주님으로 섬기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또 다시 안타까운 모습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 이 모습은 성경에 영적 간음이란 말로도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우상숭배를 “중독과 같다” 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끊지를 못해요.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가면서 그 규모가 커지고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알아요. 이 길의 종착역은 멸망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빠져 듭니다. 마약중독, 알콜중독,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강도가 높아져 갑니다.
자, 성경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0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바알신만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알신의 배우자 신인 아스다로만 섬긴 것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범위가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이 신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배도입니다. 여기에 언급한 여러 신들과 부족들을 지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 신입니다.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가장 넓은 지역에서 섬기던 신입니다. 아람과 시돈은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모압과 암몬은 요단강 동편에 있으며, 블레셋은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완전히 포위당했으며 헤어 나오기가 어려운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시는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궁극적인 사명은 가나안 땅의 타락한 문화를 변혁시켜, 여호와의 말씀의 토대 위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그 땅의 거민들이 선한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신으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구원자로 섬기며 평화를 누리도록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첫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그 땅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후 430년간의 비옥한 땅, 애굽 고센 땅에서의 노역생활 속에서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200만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다시금 그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면 되는데 거꾸로 주변 족속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에요. 문화의 뿌리가 되는 종교, 저들이 섬기는 신까지, 받아들이고 섬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럴까요?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기에 빠져들고 또 빠져들고 말았을까요?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달콤함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우상들은 사람들의 욕구에 의해 고안 되었습니다. 그 욕구의 가장 원초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다산’ 이라는 말로 표현이 됩니다. 농사를 하는 사람들의 신으로써 그 신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풍성히 공급하며 또한 자손의 번성과 가축의 증식을 보장해 주는 신이라 여겼습니다. 매력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못 주시나요? 신명기 28장을 읽어보시면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종교의 신에 빠져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곧 성적 활동을 강조하고 또 자극하는 데에 있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가나안 사회는 풍기가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윤리적 파탄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농사에 필요한 비를 얻기 위하여 또한 사람과 가축의 다산을 위하여 신을 즐겁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몸의 정조를 신전에서 신 앞에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전창기들이 늘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에 품행이 깨끗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은 사단의 문화입니다. 감각을 자극하고 쾌락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기분이 좋으면, 세상말로 FEEL 가는대로, 육신도 영혼도 파는 것입니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 끝이 멸망입니다. 윤리도 없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움을 조장합니다. 그런데 숨어서 하는 것이 아니요, 공적으로, 합법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가 전체적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어제 재판이 있었습니다.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냐? 아니냐? 암묵적인 허락이냐? 법적으로 죄가 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사들이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파장이 클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결과들이 나올 것입니까? 이 사회가 어디까지 어둠의 문화로 달려갈 것입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애립니다.
그러나 바알 신과 달리,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거룩의 하나님이요, 성결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기에 주께서 주신 계명은, 말씀은, 죄성을 깨뜨려, 생명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인류를 구합니다.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되는 모든 병든 쾌락과 느낌과 물질과 권력과 이기주의에 결코 구속당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두움을 깨고, 뚫고 들어가는 밝은 빛입니다.
이 시대에 C.S. 루이스라고 하는 변증학에 뛰어난 목회자이며 신학자인 팀 켈러는 이 시대에 여전히 존재하는 우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것’일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당신에게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을 ‘하나님 자리’에 앉힐 때 끔찍한 악을 낳는 영적 중독이 시작 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제일 소중하고 좋았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에요. 문제는 그 아들이 그의 마음을 다 차지하게 되면 하나님을 모실 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한때 기쁘게 해 줄지는 몰라도 그가 인생 전체를 책임지는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으십니다. “네 아들을 제물로 바쳐라” 순간 아브라함이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그랬구나! 내가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구나~!” 주저 없이 순종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아들을 주신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것도 이미 생식의 능력이 없어진 100세이 나이에 주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신데, 그러니 그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원하시면 또 주실테니까, 땅과 자손과 민족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그 100세에도, 아들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 하나님이시니,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비슷합니다. 물질, 권세, 성공, 명예, 사랑, 건강, 성욕, 장수, 가정과 자녀, 인기, 지식, 학위...,
다 좋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섬겨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게 되면, 그래서 늘 맘에 그게 자리를 잡고 있어요, 그래서 늘 그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심지어...., 나아가서 신앙의 목적이 그거에요.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그거 갖게 해주세요, 그거 이루게 해주세요.” 이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바알신이고 아스다롯 신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게 나쁩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좋아하고 섬기도록 내어 버려두시지 아니하시는가? 그렇게 좋으면 그냥 쿨~ 하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실 수는 없으신가? 왜 그토록 막으시는가?
성공, 돈, 권세, 건강, 미식, 사랑, 인기, 명예,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인가? 그냥 추구하게 내버려 두시지,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으셨던 첫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로 인해 창조주되신 하나님과 피조물된 인간이 그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 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샬롬’ 즉 평화와 평강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전인적으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신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 중심의 자리에 좌정하실 때에, 내 삶의 주인님으로 계실 때에, 은혜가 임합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성공도 의미가 있고, 돈도 권세도, 명예도, 건강도, 가정도, 자녀도, 지식도, 지혜도, 의미가 있어,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웃에게 유익이 되며, 내 자신에게 영원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질서가 잡히고 세상말로 탁 트인 길로 달려가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설 때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숭배에 빠져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이 시대의 사회풍조를 봅니다. 그 뒷 배경에는 사람이 심리와 욕구를 교묘히 이용하는 악한 영적 세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새벽에도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내가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그 무엇이 있다면 내려 놓게 하옵소서! 주님이 내 마음의 주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인생의 목적이 되게 하시고 추구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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