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사기4:12-16 개역개정
-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리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왜 고통이 반복되는가?
사사기를 읽다보면 우리는 일종의 반복되어지는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평안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니 도덕적으로도 타락합니다.
둘째, 그 패역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주변의 적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하게 되고 노예의 신분으로 하락하여 학대를 받게 됩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금 회개하며 부르짖으며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외면치 아니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를 부르시고 적들을 물리치게 하시며 다시금 평화를 회복시키십니다.
이 반복되는 상황이 사사기에 계속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가만히 보면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태신앙이든, 자기대의 신앙이든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이 임합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화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잘 유지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거꾸로 갑니다. 평화가 임하고 잘 되는 것이 마치 내가 열심히 하여 취득한 것으로 여깁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도...., 날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것을 망각합니다. 그러니 “대충 믿어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속히 돌이키기를 바라십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면 마냥 멀어지는 거에요.
결국 뭔 일이 납니다. 깨우치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질병이 오든지, 사고가 나든지....., 나는 조심, 조심하는데...., 엉뚱하게 자녀로부터 문제가 터집니다.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사업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그냥 자유롭게 내어버려 두세요. 내 마음대로 살게요. 간섭하지 않으셔도 알아서 살 수 있어요. 어린애가 아닙니다. 구속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게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믿음으로 성숙해서 흔들림이 없을 때에, 영혼의 자유함을 얻게 하십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성장하여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을 때에 부모가 “그래, 잘 해라!” 하고 자율권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인데 성숙하지 못해 아직 수염도 안났는데 면도날을 들고 면도를 하겠다고 한다면...., 또한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아버지의 차를 몰로 나가서 남의 차 수십대의 차를 들이받고...., 높은 고층 옥상에서 벽돌을 떨어뜨리지를 않나.... 여전히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존재인데.......,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할 테니 염려마세요. 나를 놔 두세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함’에는 일정한 계약 조건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지켜 행하면....” 이라는 조건입니다. 지켜야 할 규례와 율례가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횡적언약’이다 라고 합니다. 쌍방간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읽어 주고, 이것을 “다 지켜 행하라”고 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 다 지키겠습니다”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피로 세운 쌍방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생계에 필요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고 그 땅의 경작을 통해 수확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만일에 계약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도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켜 행하면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잊지 않도록 여호수아에게도 강조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시대였던 구약시대는 그렇다치고, 이제 은혜시대인 신약시대는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우리에게 구원도 은혜로 주어졌고, 평안한 삶도 거저로 주어진 것 아니냐?
예~! 한편으로 맞고, 한편으로 틀립니다. 맞는 것은 예수께서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었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성품도 변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은 영혼구원을 얻도록 명하신 것이 아니요. 여전히 저 하늘나라에 입성하기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령이 계속해서 나를 인도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모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승리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영생의 구원을 넘어서서 이 땅에서 잘되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힘쓰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더 풍성한 삶을 얻도록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그런가하면 야고보서 1장 25절에 또 말씀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율법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이 새벽에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늘 깨어 기도하고 또 힘을 얻어 실천하시므로 이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하며 하늘나라에서는 영생복락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아시고 사사기를 읽어 가시면 더 이해가 쉽고 더 은혜가 될 것입니다. 본문으로 가시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패턴이 반복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이 나옵니다. 4장 1절을 읽겠습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에훗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았던 사사였습니다. 팔십년 동안 평강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저가 세상을 떠나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세상으로 돌아섰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유혹적인 존재로 믿음의 사람들을 옭아맵니다. 오늘날 세상의 쾌락주의가 그것입니다. “부어라 마셔라 늙어지면 못노나니.....” 인생의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값주고 사신 저들을 어떻게 하셨다고 합니까? 도로 파셨다.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 고 했습니다. 노예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버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탕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서 멀리 떠났어요. 허랑방탕했어요. 그러나 저가 비록 아버지를 떠났어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에요. 이웃들의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저가 돌아 올 때에 "아니, 저건, 아무개 집 아들 아니여~?“ 버려진 것이 아니라 지가 떠났습니다. 너무 오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 언제고 다시금 받아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고난 속에서 다시금 여호와의 자비와 은총을 바라며 회개하며 부르짖습니다. 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20년 동안 심히 학대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야빈왕은 철병거가 구백대가 있었다고 하니...., 철로 만든 마차...., 비옥한 평지를 차지한 야빈왕, 그 평지를 달릴 수 있는 강력한 기병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길 수가 없어요. 자유가 없습니다. 고난입니다. 아픔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의 형제 중에도 있어요. 오랫동안 신앙생활하지 않고 또 왜 그리 술을 좋아하는지 몇 달 전에 간에 암세포가 발견되고 수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정신 차려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았어요.
그렇게 암진단을 받고서도....., 사나이 자존심인지 감추고 기도하러 오지 말라고.....그래도 안 갈 수가 없지요. 병원에 찾아가 기도하는데...그 아픔속에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제가 기도하자고 하니 제 손을 잡고,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잡은 손을 통해 그 느낌이 옵니다. 제가 알 수 있지요.
다행히 간 속안에 있어 전이가 되지 않았다고 했고 수술도 잘 되었습니다. 이후에 후유증으로 먹기만 하면 설사하고 20킬로 이상이 빠졌어요. 그 모습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최근에 적응이 되어 다시금 살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이지요. 이제 그렇게 좋아했던 술을 못 먹어요. 진작 적당히 했어야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해요. 주님 떠나면 절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중에 하나인 절제가 사라져요. 그래서 중독이 되는 거에요. 알콜중독, 마약중독, 도박중독...., 그러니 늘 주님 앞에 서야 해요. 묶인 자유라고 불평하지만...... 그것이 행복인 줄을 나중에야....., 그렇게 투병을 하고나서야 알게 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울부짖음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여 사사인 드보라를 세우십니다. 전쟁터에는 바락이 나가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가 하면 겐족속의 여인 야엘을 세워 적장인 시스라를 죽입니다. 이와같은 내용은 내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긍휼이 많으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어져가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금 회개하고 부르짖으니 건져주십니다. 그러기에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늘 주님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로 늘 무장하셔서 형통함의 역사로 인생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