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사기3:1-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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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팔았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천국백성과 이 세상 사람들의 차이점 중에 하나가 바로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세상에서는 상식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걸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신을 부인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많이 모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많이 나눠주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세상 기준의 법과 틀이 있어요. 그 틀은 더 이상 내려가지 말도록 그 한계선을 밝히고 있지만, 성경은 세상의 상식 그 틀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의 법과 틀은 눈에 보이는 외적이고 육신적이지만, 성경의 기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부분을 포함하는 영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므로 세상 법은 겉으로 들키지 않으면 돼요, 그러나 성경은 양심에 저촉되었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은 간음하면 발각되는 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하늘나라 백성의 기준은 “누구든지 음욕을 품고 여인을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5:27,28)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살인을 하면 심판을 받겠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마5:21,22)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잘못은 그 기준이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데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결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편리함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데.....저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그래도 부잣집의 딸과 결혼을 한다는데 저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통혼을 합니다.
당시 세상 적으로 볼 때에는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미 십계명을 통해서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세상적인 기준과 상식에 발을 맞춘 것은 언제부터 입니까? 저들이 가나안 족속과 섞여 살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세 때부터 명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저들을 진멸하라”
왜 그런 무서운 명령을 하셨을까요? 물들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저들이 대대손손 지켜온 신앙의 뿌리는 사탄적입니다. 바알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따르는 야훼신앙과 정면으로 상치됩니다. 비윤리적입니다. 어린 아가를 산제물로 바칩니다. 거룩하지 않습니다. 신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신전에서 자해를 하는가 하면 남녀간에 성적교합을 갖습니다.
“나는 안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판명되었습니다. 문화가 먼저냐? 종교가 먼저냐? 한 인간과 공동체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그 시대의 문화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그 답은 신앙입니다. 종교적 신념에서부터 문화가 발전합니다. 신앙에서부터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적인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를 말하지만 세상은 인간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 위대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를 앞세웁니다. 힌두교가 그렇습니다. 뉴에이지가 그렇습니다.
시대가 바뀌니 그 시대에 맞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것이 대세가 되고 문화가 됩니다. 성차별법이 생깁니다. 동성간에 결혼을 합법적이라고 합니다. 절대진리는 없으니 모든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으니 궁극적으로 서로 같은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천주교든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자.
그 영적인 공동체의 뿌리가 하나님을 떠나버린 세상임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주의 풍조가 만연해지더니 이제는 이기주의로 발전합니다. ‘나’ 라고 하는 울타리를 칩니다. 문을 열어주지를 않아요. 그러니 이웃이 있습니까? 얼마나 사회가 냉냉해져 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고 ‘우리’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나에게 뿐만 아니라 내 이웃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나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오늘 성경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평화주의자들로 비칠 수 있습니다. “한 땅에서 같이 살자” 거기까지 이를 수 있는 영적 실력이 된다면 하나님도 허락하실 거에요. “그래 같이 살아라. 그리고 저들에게 전도해라”
그런데 저들이 거꾸로 공격해 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시대로 말하면 사단은 문화의 탈을 쓰고 기독교의 기본신앙과 성경적 신앙을 좀 먹어 들어옵니다. 믿는 자들의 거룩을 훼파하려 합니다. “좋은게 좋은거야! 봐라,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가쟎아~! 왜 유독 왜 당신만 그렇게 살으려고 해” 성별된 백성이 구분이 없어집니다.
지난 주에 우리 청년들이 필리핀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가서 함께 사역하는 현지인 청년들의 신앙에 큰 도전이 되었다고 했어요. 우리 청년들의 사역을 돕기 위해 바쁜 가운데에서 온전히 시간을 내고 선교지의 산을 올라갈 때에, 물을 건너갈 때에, 우리 청년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메고 들어주고......그리고 산 위 마을에서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같은 또래 청년들의 신앙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뭔가? 내 신앙은 정말 내 신앙인가? 단순히 부모의 신앙에 묻혀있고 그냥 묻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청년자매는 필리핀에 다녀온 경험을 나누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어요. 그 딸의 고백을 듣는 아빠도 엄마도 같이 울었다고 했어요.
어젯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필리핀 다녀온 여학생들이 앉아서 오는 주일 오후에 있을 선교보고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제가 얘기했죠.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수고 많았어요. 이제 매년 선교하러 나가야지? 내년에는 네팔이야!” 그랬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청년의 때에 세계를 한 바퀴 돌아라” 그랬더니 좋아라 하고 웃어요.
기독청년으로써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나가서 보면 알아요. 다른 영적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내가 누구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딸인가? 아들인가?” 전도할 때에 가장 확실히 압니다. 그 이교적인 분위기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는 현지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볼 때에 자신을 비쳐보게 됩니다.
왜 한국에는 이런 일이 없는데....., 선교지를 다녀오게 되면 깨닫고 변하게 될까요? 한국에 있으면 묻혀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와 사조에 그냥 휩쓸려 내려가는 거에요. 특별히 대학생들이 그렇지요. 눈에 보이는 게 다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 비슷해 보여요. 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잠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민의 문화 속에 젖어 들었습니다. 저들이 섬기는 바알신을 섬깁니다. 말씀드렸습니다. 문화는 영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는 거주민의 딸들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딸들을 저들에게 내어 줍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결국 저들의 신까지 섬기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전쟁입니다. 평화를 유지해 나갈 것 같은 주변의 거민들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라!” 그 말이지요.
성경말씀 1절로 3절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일곱 족속이 이스라엘을 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전쟁을 하게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낭만적인 전쟁은 없습니다. 전쟁을 하고자 하면 칼부림에 피비린내가 나고 가족은 흩어지며 자녀들은 미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게 하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을 다시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해봐야 진지해집니다.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세상의 풍조로 병들지 않습니다. 진정한 하늘백성이 되고 진정한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괴로움을 당하는지 보십시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전쟁에서 졌습니다. 전쟁을 알지도 못하니 가만히 앉아서 당한 것입니다. 영적인 야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항복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셨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습니다. 팔년 동안 종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9절 말씀이지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구원자를 세웠는데 저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시고 여호와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시니 나가서 싸울 때에 승리합니다. 비로소 사십년동안 평강이 저들에게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러면 안 되는데요. 매를 맞고 난 다음에야 정신 차리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러쟎아요?
그러나 3절의 가사처럼, “나 예수 의지함으로 큰 권능 받아서/ 주님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우리가 때로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영적 전쟁을 포기하고 세상에 묻혀 “좋은게 좋은거야~!” 하고 그냥 세상 풍조에 묻혀버립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영적인 민감함, 거룩의 예민함, 성령님과 더불어 죄악과 겨루어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야성을 잃지 않습니다.
이 새벽에도 다시금 영적 무장을 해야 하겠습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부어 주사 세상을 너끈히 이길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로 나아가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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