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열왕기상11:29-43 개역개정
-
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30.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33.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34. 그러나 내가 택한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의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35. 내가 그의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38.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39. 내가 이로 말미암아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한지라
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41.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그의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는 솔로몬의 실록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 년이라
43. 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죄에 무디어진 자의 종말
40년간 나라를 다스렸던 솔로몬왕은 그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지혜의 왕으로 알려진 그는 그의 통치 말년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이유는, 어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입니다. 그를 떠나신 이유는 그가 먼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1장 9절에 솔로몬의 그 잘못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니라”
솔로몬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자기과신’ 이었습니다. 아버지 다윗과 달리 그는 실패의 경험이 없었어요. 모든 일이 순탄하게 부흥 발전되었습니다. 왕이 되고 정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출중하니, 온 나라에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이었어요. 나라는 부강해졌습니다.
그와 같이 잘 나갈 때에 정말 잊지 말았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할 때에 지속될 것이라는 MoU, 하나님과 함께 만든 상호이해각서가 아니었겠습니까? 즉 하나님과 체결한 언약을 솔로몬은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영원히 자신의 것이요, 자신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과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웃 나라의 공주들을 아내로 삼고, 비록 저들이 자신들의 신을 섬긴다 해도, 내가 누군가? 누구보다 지혜가 뛰어난 나 솔로몬이 아니겠는가? 내가 저들에게 넘어가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이런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罪性(죄성)의 무서움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 다윗은 자신의 한계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아니 인간이 절대로 신적인 존재가 아닌 연약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는 죄에 대하여 늘 민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죄를 범한 후 철저하게 회개하고 후회하면서 고백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사람이 가지는 그 한계에 죄가 있음을 늘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언제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그러니 늘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을 갖게 되고 잘 나갈 때가 언제나 문제입니다. 권력은 사람의 죄에 대한 민감성을 잠들게 합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권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죄가 더 가까이 접해온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부하들만 전쟁터에 내보내고 방심하는 사이, 시험에 빠져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의 충성된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어요. 그리고 후한을 염려하여 그 충성된 장수인 우리아를 전쟁터의 맨 앞으로 내 보내어 결국 죽게 합니다. 불쌍한 우리아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아의 편에 섭니다. 역사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결코 다윗의 아내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족보에 그 이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1:6)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끝까지 우리야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교단도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가르침이에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대속으로 인해, 구원을 받습니다. 죄가 없어져서가 아니라, 예수의 공로로 인해 “죄 없다”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즉 죄인을 의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를 ‘칭의구원’이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죄인에게 누군가가 대신 보석금을 지불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 받게 되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보석금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지은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용서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이를 이룬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입구에서 우리자신이 의인이기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붙어 있는 가격표 태그를 스캔하면 ‘삑~!’ 하고, 모니터에 보여줍니다.
“예수가 대신 죄 값을 치루었음, 통과” 아멘~!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언제고 그 주의 은혜로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내재된 죄성은 어떻게 합니까? 언제 없어집니까? 이 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평생을 거쳐, 점진적으로 성화되어져 갑니다. 그러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예수를 마음에 구주로 믿고 영접하므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칭의구원’과 다릅니다. 이를 ‘성화구원’(sanctification)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에 민감한 성결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성은 있으나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 있을 때에 즉각 반응합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인정을 합니다.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봅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이 회개했을까요?
우리가 늘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 곁에 언제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럴 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깨끗한 영혼으로 설 수 있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인 것이에요.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안타까움을 가졌습니다. 왜 솔로몬의 느즈막한 인생의 때에 이렇게 비참해져야 할까? 이웃나라 공주들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솔로몬에게도 나단 선지자와 같은 자가 곁에 있어서, 직언하기를 “우상을 섬기는 이웃나라 공주들을 더 이상 데려오지 마시오” 라고 직언을 해 주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였습니다. 누가 그 지혜가 출중한 솔로몬의 마음을 다스리겠는가? 그 권세와 능력 앞에 누구의 말이 통하겠는가? 평소에 죄에 대하여 민감함이 없는 그에게 통하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두 번이나 강하게 지적을 하였음에도 듣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9절과 10절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9.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10.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이후에 나타나는 어려운 상황을 보게 됩니다. 대적이 등장합니다. 이방지도자들의 반란입니다. 하닷과 르손이 저들입니다. 저들은 다윗 때부터 남아있던 불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란을 하지 않도록 붙잡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언제고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 기세로 노리고 있는 악한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켜 보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악한 것 더러운 것들이 틈타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지키시는 손길, 바로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그래서 감사하지요.
그러나 우리 편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 악한 세력에게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에요. 저들은 언제고 사람이 빠져들 수 있는 죄의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깨어 기도하는 자에게 죄의 시험이 침범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같은 에브라임 지파, 동족 중에 여로보암이 또 반대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선지자인 아히야가 그의 편에 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그가 미리 보고 있습니다. 저가 장차 되어질 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9절로 32절까지 읽겠습니다.
“29.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30.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31.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32.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을 동시에 봅니다. 솔로몬을 징계하십니다. 그의 아들은 나라가 둘로 나위는 비극을 경험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종 다윗을 위하고.....”
그 후손 중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강림을 약속하신 하나님,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유다지파를 살려 놓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때로 내가 범한 죄로 인하여 잘못으로 인해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시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시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 앞에 나오고 다시 일어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다시금 믿음의 사람으로 서시고 승리해 나가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