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역대상10: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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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이 싸우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다가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추격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고
3. 사울을 맹렬히 치며 활 쏘는 자가 사울에게 따라 미치매 사울이 그 쏘는 자로 말미암아 심히 다급하여
4. 사울이 자기의 무기를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의 무기를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행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니
5. 무기 가진 자가 사울이 죽는 것을 보고 자기도 칼에 엎드러져 죽으니라
6. 이와 같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 온 집안이 함께 죽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내 인생 여정의 종착역에서
오늘 역대기상 10장의 내용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종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그 전장에서 죽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 아들인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함께 전사합니다. 한 나라의 큰 비극이자 한 가문의 비극이에요.
그를 쫓는 블레셋 군대는 맹렬하였습니다.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활을 쏘는 자가 거친 기세로 사울을 쫓으며 활을 쏘아댑니다. 적군의 활에 맞아 죽게 될 것을 감지한 사울은 자신의 곁에서 그를 지키던 직속 부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적군의 활에 맞아 죽었다 라는 불명예스러운 죽음보다는, 차라리 자결하였다는 모습으로 명예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 부하는 두려움에 떨며 하지를 못 해요. 감히 자신이 섬기는 왕을 자신이 죽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죠.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드려져서 자결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0세였어요.
오늘 10절에 보니 죽은 사울의 갑옷을 벗겨 블레셋 나라의 신전에 두고 사울의 머리를 다곤의 신전에 달았다고 했습니다. 그 수치스러운 얘기를 들은 이스라엘의 용사들이 다 일어나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왔다고 했어요. 야베스로 가져다가 그곳 상수리나무 아래에 그 해골을 장사하고, 칠 일간 금식하였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비참한 사울의 말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고 또 당연히 죽음을 맞이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임종의 모습이 있어요.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십니까? 생각해 보셨나요? “목사님, 저는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살 만큼 다 살고 평안한 가운데 가족들과 작별을 하고, 기력이 다 쇠진하여 숨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세상 떠나는 모습은 슬픔이요, 아픔이에요. 갑작스런 사고로 인하여,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또는 전쟁에서 죽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공통점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더 살아야 하는데,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인과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아픔과 슬픔을 줍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영혼의 창조주요, 생명의 소유주가 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이렇게 슬프고 비참하게 죽어야 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진술합니다.
오늘 본문 10장 13절과 14절에 기록했어요.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10:13~14)
그의 비극적인 죽음의 이유는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하였으니, 첫째,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요, 둘째, 신접한 여인에게 가르침 받기를 바란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거짓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말렉 군대의 모든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아깝다하여 남겨두었습니다. 하지 않았으면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실행하였다고 사무엘 선지자를 거짓으로 속였어요. 그러나 사무엘은 알지요.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그런가 하면 전쟁 앞에서 선지자의 조언과 기도를 받아야 하는데, 사무엘이 늦게 오게 되자 기다리지 못하고, 왕의 영역이 아닌 제사장의 역할인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자신이 직접 하였습니다. 이는 영적 교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왕권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인데 그 권좌를 자신의 임의대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하고, 당시 백성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던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 표현으로, “권력을 맛보게 되면 헤어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울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모습이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감히 나는 그 자리에 설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숨었던 자였어요. 또한 부모에게는 효자였습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오라는 아버지 기스의 명령에 찾기 전에는 집에 오지 아니하고, 이곳저곳 여러 지역을 다니며 찾아다녔던 그는, 그처럼 순수했던 자였어요.
그런데 변했습니다. 왕이 되어 권좌에 앉으니,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명령 앞에 복종하니, 자신의 뜻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의 인생가치관이 바뀌고 신앙관이 변질되었습니다.
그의 변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경의 기록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0절의 말씀이에요.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삼상15:30) 이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나를 높여 주소서!”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어도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를 높여 주소서!” 어떤 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까? 네, 야욕을 이루기 위한 권력자들의 멘탈리티 아니겠어요? 죄를 범하면서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더 높은 자리를 탐하는 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있어요.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사명을 받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생명으로 보내신 이유이며, 오늘을 살게 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크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에 쓰임 받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에요. 그런가 하면 적게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신 은사를 가지고 십분발휘하여 여러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며 최선을 다해 행하고, 그 일로 이웃의 필요들을 도우며,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행복을 갖게 하시고, 더 확대한 가정의 모습으로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피차 서로 도우며 격려하며 위로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라고 했어요.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다 마치면 다시금 우리의 영혼의 본향인 하늘나라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와 더불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이것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모든 믿는 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창조주요,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뜻대로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하여 범죄하면서도 권력을 누리고,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은 인생을 잘못 살아도 많이 잘못 사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위대한 전도자인 죤 웨슬리(John Wesley)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밤 열두 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늘 하루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때 죤 웨슬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 준비와 심방을 하겠소. 그리고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겠소!”
무슨 뜻이겠어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죽음을 30분 앞당겨서 맞이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죤 웨슬리의 동생이며 찬송가 작사자인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죽음 직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기쁠 뿐입니다. 아, 만족하다, 만족하다!” 얼마나 평화스럽고, 행복한 죽음인가요? 그는 천국에서 자기를 맞이해 주시는 하나님의 기쁜 낯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요, 잠시 쉬었다가 영원한 그 나라의 삶으로 이어지는 ‘쉼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이할 때, 기쁨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작자 미상의 한 시가 있습니다. 시의 내용을 볼 때, 이 시를 쓴 사람은 미국 대륙의 한 농장에서 성실하게 신실하게 한날 한날의 수고를 하던 한 사람입니다. 그 시의 제목이 ‘그가 오실 때’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인데, 주께서 내 살아생전에 오신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를 맞이할 것인가? 이 시는 그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오실 때 / 작자 미상
그가 오실 때, 목화 따는 나를 보시리라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소리 높이 외치는 소리
그가 오실 때, 목화 따는 나를 보시리라
그가 오실 때, 나는 목화밭에서 무릎을 꿇으리라.
어떤 뜻이 담겨져 있나요? 주께서 내게 맡겨주신 매일 매일의 일에 충실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오시는 날,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신실하게, 주께서 주신 동산에서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자를 안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에요.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제 네 주인의 잔치에 참여할지어다!”
성도 여러분, 이 확신이 있습니까? 이 믿음이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니면 주님 오늘 밤에 오셔도, 내일 아침에 오신다 해도, 평안함으로 주를 맞이할 것입니까?
우리 모두 다 그러시기를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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