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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22] 내리사랑
운영자 2023-10-11 추천 1 댓글 0 조회 136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2:11-21 개역개정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14.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내리사랑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보입니다. 이 자녀 사랑의 근원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모든 생명체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고자 하셨어요. 그러므로 종족보존을 위해 새 생명이 탄생했을 때에 그 생명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찌하든지 그 어린 생명이 잘 자라나도록, 그래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이고 보호하고 키워냅니다. 그것을 부모 된 자의 본성이요, 본능이라고 말하는데, 그 본성과 본능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컸기 때문에 주변의 자연 자체가 놀이도구가 되었어요. 그중에 하나가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새 둥우리 있는 조그만 새 새끼를 꺼내다가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거기 놔두면 어련히 알아서 잘 클 텐데, 왜 쪼그만 새끼를 가져다가 직접 키우려고 했는지 몰라요. 여름철이면 메뚜기, 또는 여치 잡아다가 먹이면서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좋아했어요.

 

그런데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그 나무를 타고 새끼를 가지러 올라갈 때, 그 엄마 아빠 새는 얼마나 사납게 짹짹 거리며, 저를 공격했는지 몰라요. 자기 새끼 가져가지 말라고~! 자기 새끼 가져가지 말라고~! 얼마나 무섭게 덤볐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한 짓이 결코 잘한 짓은 아니지요. 완전 강도죠. 왜 그랬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새끼가 크고 자라면 날려 보냈으니, 그 엄마를 만났을까? 아빠를 만났을까? 사실 생각 없이 날려 보내곤 했어요.

 

여러분,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데 그 몸을 바쳐 죽기까지 사랑해요.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그 깊은 사랑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어릴 적에는 나를 보호해 주심에 의지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이제는 스스로 설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관심은 부모가 아니라 이성이요, 눈길은 배우자에게 먼저 갑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갖게 되면 이제는 그 자녀를 키우는 일로 부모 된 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자녀들이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모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므로 부모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과거에는 억지로라도 교육을 시켜서 실천하게 했어요. 이를 효 사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미덕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이를 계명으로 명령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 하리라 십계명 중 다른 것은 다 조건 없는 명령이었어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런데 유독 이 부모공경 계명만 보너스가 붙습니다. 네가 그렇게 하면 복을 주겠다. 이 땅에서 잘 되고 또 장수하게 될 것이다. 왜 보너스를 붙였을까요? 잘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효도하면 그런 자에게는 이 땅에서 잘 되고 또 장수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쉽지 않지만 잘 해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부모사랑, 내리사랑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향한 이 애타는 부모의 마음이 오늘 본문 사도바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로 이 사랑을 받는 고린도 교회 어느 성도 중에는 그러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미성숙한 모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아서 가족이 없었어요. 자녀가 없었어요. 그러므로 성도가 가족이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되면, 그들이 곧 영적 가족이었어요. 그래서 주의 사랑으로 돌보며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기쁨이요, 소망이었습니다.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12:14)

 

이 모습에서 우리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을 읽습니다. 어쩌다 방문해도 자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그러나 한편 자녀들의 성숙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는지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그 모습만 보면, 그게 다에요. 더 이상 바람이 없어요.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방문하는 것이 물질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구원받고 성숙한 모습으로 잘 사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절로 마찬가지에요. 15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12:15)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것이지요. 끝부분에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이 말씀은 그러면 너희도 나를 사랑하지 않겠니?” 그런 말씀이죠.

 

여러분, 유치환 선생님이 쓴 행복이란 시를 아십니까? 두 번이나 반복되어 우리에게 친근한 표현이 있어요. 그것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그런데 시는 그렇고..., 실제 삶 속에는, 사랑을 주다가도 때로 사랑을 받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연인이라면 더욱 그럴 거예요. 인간관계가 그렇죠. 그런데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달라요. 늘 주고도 더 줄 것 없어 마음 아픈 것이 부모의 마음이죠. 세상 떠날 때는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였으나 그 교회로부터 어떠한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그가 나중에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또 한 형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절과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후12:17~18)

 

사도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필요한 경비는 텐트를 만들며 스스로 벌기도 했으며, 또한 빌립보 교회와 같은 섬김에 뛰어난 교회들을 통해 지원받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니었던 것이에요.

그러므로 쉽게 생각하면 열 손가락 중에 고린도 교회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에도 그런 자녀 있을 수 있어요. 안타까움에 더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하는 자녀인 것이죠.

 

그런데 이처럼 사도바울이 물질에 관한 부분을 예민하게 거론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사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문명은 가르치는 자들은 강연으로 또는 설교를 하고 나면 그 댓가를 물질로 받으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면서 그러한 삶을 살았어요. 고린도 교회 안에도 있었어요.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실천과 헌신은 없어요. 그저 뛰어난 논리와 수사학으로 사람들이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했으나 정작 사람을 복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섬김과 돌봄과 양육과 헌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은 마치 삯군 목자였던 것이에요.

 

이들을 가리켜 사도바울은 뭐라고 안 좋게 표현했는가하면 지극히 큰 사도(Super-Apostles) 라고 표현했어요. 오늘날로 표현하면 주의 큰종 주의 큰 사자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쓴 이 표현이 긍정적인 것이 아니에요. 강연을 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그에 대한 댓가로 명예와 돈을 챙깁니다. 사도바울이 그 모습을 비판하면서 11절 후반부에 말씀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들이 위대하게 보일지 모른다. 강의가 좋고 설교가 감동적이고 말씀이 능력이 있다. 그런데 빠진 것이 있다. 진정한 사도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있다. 그것이 12절 말씀입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12:12)

 

진정한 사도, 참 전도자는 한 번의 또는 두 세번의 강연으로, 명설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인내, 말씀을 준비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양육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풍파와 사람들로부터 마음 상하는 일이 있지만, 그와 같은 것들을 참고 또 참고 또 견디는 영성의 소유자이어야 하고, 사역 가운데에서도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할 때는 생명이 살아나고, 기도할 때는 능력이 나타나고, 축사를 할 때는 귀신이 떠나가고, 삶에 지친 영혼을 권면할 때는 그 영혼이 소생하며, 말씀으로 양육 할 때에는 성도들이 성숙하게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어야, 진정한 사역자, 사명자인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언제 이 역사가 가능한가? 사도바울은 강조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가질 때,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끝까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복음의 역사,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방문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먼저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고린도교회 안의 잘못된 모습들이 이제는 성숙한 모습으로 서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도바울의 바램이 19절로 21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오랜만에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를 찾아가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면 감사하고 또한 믿음 생활 잘 하고 있으면 저나 여러분이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벽에도 참고 인내하며 사랑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 내 구역식구들, 그리고 가정의 형제와 자매들, 자녀들,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이 새벽에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우리의 선한 마음을 주께서 아시오니, 주께서 들으시고 변화의 역사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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