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새벽강단

  • 예배와 말씀 >
  • 산돌새벽강단
[고린도후서 강해 20] 부득이한 자랑: 약함
운영자 2023-10-06 추천 1 댓글 0 조회 129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1:16-28 개역개정

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부득이한 자랑: 약함

 

리더쉽과 연관하여 제가 보았던 책 중에 기억에 남는 한 책이 있습니다. 하바드와 콜롬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원 강의교재인데요. 경영자 또는 리더의 공감력, 소통력, 표현력에 관한 책입니다. 한국말로 번역된 책 제목은 어떤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가?’입니다. 재미있죠? 제목이 강렬합니다. 어떤 기관이나 조직체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눈을 확 사로잡을 만한 제목입니다. 얼른 사서 보겠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책의 원제목은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습니다. 'The Hidden Qualities that make us Influential' 번역을 하면 우리를 영향력 있게 만드는 감추어진 자질 이라는 제목입니다.

 

주제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지도자에게 끌리는가? 어떠한 자가 군중들을 이끌고 목적을 성취하며 능력을 발휘하는가 그 자질들을 연구 조사하고 나열해 보여줍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의 조화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강함, 또 하나는 따뜻함입니다.

 

이 두 가지 기질은 서로 너무 달라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충돌할 수 밖에 없는데요.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 강함, 강한 능력, 심지어는 공포를 조장하는 리더쉽에 의해 끌려왔음을 제시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포악하기로 유명했던 앗시리아의 군대 앞에 세상이 벌벌 떨었고, 로마의 십자군이 그랬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나,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뚱, 그리고 친가족까지 죽인 김정은의 공포정치를 보면 금방 이해가 가지요.

 

강한 지도자 앞에 군중은 끌립니다. 지도자의 자질 중 윤리, 도덕성, 청렴성은 좋아 보이지만 그래서 온도로 보면 그 자질은 따뜻하지만, 군중에게는 그 모습이 유약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강한 자에게 끌리고 그러기에 추종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오늘날 이 시대의 모습은 변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초에 성공한 CEO나 정치인들, 지도자들을 보다 더 심층적으로 조사해 보니, 최고의 영향력을 미친 성공자들의 자질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강함과 따스함이 잘 합쳐진 자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낸 것입니다.

 

능력이 남성적이라면 따스함은 여성적입니다. 능력이 힘이라면 따스함은 약한 것입니다. 능력이 튕겨낼 수 있는 힘이라면 따스함이란 품을 수 있는 매력입니다. 저자는 결국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을 겸비한 자가 이 시대의 성공적인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자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저는 이 자질을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통해 보게 되었고, 저도 그러기를 바랬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냉철한 지성 플러스 따뜻한 인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그의 영성이 나타났고 사역은 확장돼 갔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 이 조화로운 영성은 언제 나타나는가? 내가 나의 약함을 인정할 때에 나타납니다. 내가 약함을 인정할 때에 주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때로 연약해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바로 이 약함과 강함에 대한 바울의 간증입니다. 두 부류가 나타나요.

 

한 부류의 사람들은 거짓 사도들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어느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 거짓 사도는 능력자의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에 부합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끌려가고 순종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강함이 있어요. 그게 매력적입니다. 좋아 보입니다.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줄 지도자로 보이는 것이에요. 19절에 나타나는 그 거짓 사도들은 사도바울이 볼 때, 어리석은 자들이에요.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볼 때는 강한 자입니다. 그래서 순종해요. 20절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11:20)

 

이단의 교주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성도를 종으로 삼고 무조건적 순종, 즉 맹종을 강조합니다. “잡아 먹는다고 했는데, 이는 수탈입니다. 다 가져다가 바치라는 것이에요. 성도가 경제적으로 어떻게 사는지는 헤아릴 바 아니에요.

 

종으로 삼는다 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꼼짝 못하게 가둬 넣습니다. 다른 교회가면 큰일 나요. 먼 곳에 이사를 가도 안돼요. 늘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높인다 고 했습니다. 자신이 한없이 높아지는 것이에요. 제가 말씀드렸지요. 영등포 어디에 있는 이단교회의 교주는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 우편에 누가 앉아 계시냐? 예수님이 계시지요. 그러면 좌편에는 누가 계시냐? 알쏭달쏭! 합니다. 누가 있다는 거에요? 바로 자신이라는 거지요. 그런가 하면 자신은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의 영은 깨어서 세계를 순회 한 대요. 네팔에 보낸 선교사도 방문한다고 해요. 자신이 무슨 성령이나 됩니까? 자신이 쓰던 손수건을 네팔에 보내와요. 그거 얹고 기도하라고...., 한 없이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 교만하여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의 영성이 그 마음 저변에 깔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뺨을 칠지라도....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폭력이에요. 조직을 이탈하려고 하는 자를 위협하고 언어적 폭력, 때로는 정말 육체적 폭력을 하고..... 이단연구소장 탁명환 목사님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세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자는, 강함이 좋고, 강함을 두려워 하면서도, 그 앞에 순종하며 추종합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영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강한 것 같으나 정작 본인은 약합니다. 그 강함은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강해집니다.

 

그는 자신의 잘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어요? 자신의 자랑 때문에 행여나 주님이 높아지시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늘 성경본문에 사도바울이 자신을 내세웁니다. 자신이 체험한 신령한 영적체험, 세 번째 하늘에 다녀온 것과(참고:고후12:2) 낙원에까지 가서 많은 계시를 받았으며....또한 자신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내세웁니다.(참고:고후11:5)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 모습은 원래 바울의 영성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신분과 능력과 자질과 경험을 내세우는 것은 그와 같은 강한 것들, 능력을 최고의 것으로 알고 있는 고린도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 그래서 능력 많아 보이는 강한 거짓 사도들에게 초점을 빼앗긴 성도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1절에 사도바울은 말씀하기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고후12:1) 그리고 오늘 본문 1117, 18절에도 언급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후11:17~18)

 

어리석은 자와 같이 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강한 자들, 거짓 사도들입니다. 그러면 왜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자들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고 듣고 따르고 순종하니까요.

 

한 때 한국강단에 1990년 초반부터 20여년 동안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하나같이 박사학위를 따려고 했어요.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런 의도를 아는 미국의 형편없는 신학교들이 돈을 받고 학위를 남발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박사라고 하는 타이틀이 세인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믿어도 세상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강한 자의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이 그렇습니다. 세상이 그것을 원합니다. 거기에 편승하다보면 정작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영성, 그 거칠고 볼품없는 십자가, 사람들이 외면하는 십자가, 그러나 거기에 능력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히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인데...., 개인의 능력으로, 명예로, 감투로, 강한 모습으로 해결하려고 몸 부림치지만....,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다 아시지요.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데 어떻게 거룩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여러분, 주안에서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자랑하시고자 하시면 나의 약함을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23절로부터 열거되어지는 사도바울의 자랑은 세인들의 눈에 보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피하고 싶은 것들이죠. 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태장으로 맞고, 돌로 맞고,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광야의 위험, 못자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헐벗고.....” 이 중에 어느 것도 부러운 것이 없어요. 피하고 싶을 뿐이지요.

 

그러면서도 바울에게 이보다 더 큰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다고 했습니다. 28, 2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

얼마나 진실한 주의 종입니까? 이러니 하나님께서 쓰지 않으시겠습니까? 복 주시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을 섬기시느라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와서, 선교사의 삶을 사십니까? 때로 속 터지고, 가슴 아프고, 눈물의 골짜기 험산준령에 지치고 힘듭니까?

 

직분자로 구역장으로 나 하나 추스르기도 바쁜데..., 하물며 구역원들, 연로하신 분들을 섬기세요. 그런가하면 개 중에는 믿음이 연약하여 뺀질뺀질 말도 안듣는 모습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까지, 손주들까지 기도 제목으로 삼고, 어찌하든지 작은 목자의 모습으로 사시려고 애씁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바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곤한 몸으로 집에 가면 컴컴한 집안에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그때 저는 네팔에서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말하지요. 여보 나 다녀왔어~! 오늘 하루도 나 수고 많이 했어!” 이 모습은 네팔에서 선교사역으로 수고하는 제 아내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은혜로 이 종의 마음을 감싸 주시고 격려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 오늘도 수고 많이 했다. 내가 다 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약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할 때 강함으로 역사하십니다.

 

이 축복이 이 자랑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살리고 살찌우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고린도후서 강해 21] 육체의 가시는 능력의 통로 운영자 2023.10.10 1 115
다음글 [고린도후서 강해 19] 다른 복음 운영자 2023.10.05 1 159

08610 서울 금천구 시흥대로75길 20 (시흥동, 산돌중앙교회) 산돌중앙교회 TEL : 02-803-1135 지도보기

Copyright © 산돌중앙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20
  • Total204,275
  • rss
  • facebook
  • facebook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