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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8]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운영자 2023-10-04 추천 1 댓글 0 조회 120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0:12-18 개역개정

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미국 유학 기간에 저는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에 비해 얼마나 많이 개개인의 능력과 역량을 겉으로 나타내고 드러내고자 노력하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서양 정신문명의 기초가 되는 소위 개인주의, individualism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그들은 단체보다는 개인을 높이 세우고, 또한 능력있는 자를 영웅으로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목사라는 직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 학위가 있으면, 그냥 목사님으로 안 불러요. Rev. & Dr. Yeonjeong Kim. 즉 박사 목사님 김연정으로 칭하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제는 저를 소개할 때 Rev. Dr. & Poet, , “박사, 시인 목사님, 김연정!” 이렇게 부를 겁니다.

 

학교 이름이나 도시 이름이나 공항 이름이나 건물 이름이나 공원 이름이나 심지어는 길 이름도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름들로 그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뉴욕에는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존 F. 케네디 공항이 있고, 와싱톤 D.C.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조지 워싱톤 대학이 있습니다. 장로교단의 신학적 창시자인 죤 칼빈의 이름을 따라 세운 칼빈대학교가 있는가 하면, 감리교 운동의 창시지인 죤 웨슬레의 이름을 딴 웨슬레 대학교가 있습니다. 명문이라고 일컫는 대학들의 이름이 대부분 사람들의 이름을 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바드, 예일, 프린스톤, 윌리암 앤 메리, 스탠포드 대학교가 다 그렇습니다.

 

반면 자연의 크고 광대함에 비해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아시아에서는 이런 모습이 드물지요. 지역 이름을 강조합니다.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전남대학교, 한국의 동편에 있는 대학 그래서 한동대학교..., 또는 좋은 뜻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신격화한 북한에서는 최고로 쳐주는 대학의 이름이 김일성 대학교입니다. 굉장히 예외적이죠.

 

오늘 성경 본문의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바로 이 서양문화의 기초인 인간을 높이는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바울을 평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기준으로 바라본 바울은 여러 가지로 부족해 보였습니다.

 

첫째는 그의 왜소한 외모입니다. 그는 안질을 앓고 있었다고 알려지며, 키도 작았다고 전해집니다. 육체미를 강조하는 헬레니즘 문화에서 이렇게 별로 우람하지 않은 체격을 지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특히 책망하는 말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비방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말에 능하지 못한 점입니다. 116절에 보시면 그가 스스로 인정합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치 아니하니....” 당시 헬레니즘의 철학과 수사학이 발전했던 고린도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수사학적인 면이 부족한 바울은 그들의 기준에 미달일 수 있었고, 그러기에 대단치 않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높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겸양의 모습이 사람을 높이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자칫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력서 잘 써야 합니다. 초두에서 말씀드렸지만 충분히 자신을 잘 드러내야 해요.

 

사실 바울은 뛰어난 사역자였지만 비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한때 그러셨지요.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갈릴리의 목수 출신이라는 비방을 받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서는 메시야로 인정하고 수만 명이 그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지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다들 멀어지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의 틀 안에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외적인 미가 세상의 모든 것인 것처럼 여기는 사춘기와 청년기에는 잘 생기고 예쁜 연예인들이 아이돌, 우상이 됩니다. 물질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부자가 된 사람을 보면 영웅처럼 보입니다. 성공했어!” 라고 최고의 점수를 줍니다. 학적으로 열등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서울대나 하바드 대학교를 나온 사람을 보면, 멋있어 보이면서 한편으로 기가 죽습니다. 내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여기지만, 그것도 인생의 다가 아닌 것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니까 그런 것이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자존감이 높으신 분들이 계세요. 누구겠어요?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죠. 어디 인생 나이 80만 되어봐라! 그게 다 쓰잘 데 없는 것이여~!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거기서 거기고, 예쁜 것도 거기서 거기고, 지식도 거기서 거기고, 학벌이 뭔 필요가 있어~! 여하튼 건강한게 최고여~!” 그래서 그런지 어느 분들은 느즈막한 연세에 자나 깨나 하시는 일이 건강관리에요. , 좋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것 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자신의 평가와 기준! 이 모습이 고린도 교회 어떠한 자들의 모습이었어요. 오늘 성경 본문 12절에 사도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

 

자기가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한다 했어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틀 속에서 성공과 높임의 잣대를 만들어서 사람을 평가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울에게는 어리석어 보였어요.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바울도 바울대로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어요.

 

사실 유대 사회에서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요, 학식으로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자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당시 헬라의 철학과 로마의 법률에도 능통한 자였습니다. 그는 학문이 높아서 베스도가 말했어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6:24)고 하였을 정도입니다. 사회 신분적으로 볼 때,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위나 문벌이나 학식에 있어서 그는 자랑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자랑할 만한 세상의 기준들, 남들이 볼 때 또한 부러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뭐로 여기는가?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의 자랑의 기준은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비교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품적으로 고매하고 훌륭하며, 능력으로는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사랑에 있어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자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자신의 어느 것도 자랑치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려지는 인간적인 모든 높임은,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빌립보서 38절에 고백합니다. 그리고 전 생애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데 자신의 삶을 다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칭찬받는 것을 싫어했는가?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칭찬을 받고 싶고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기를 원했어요. 사람의 본능이죠. 그런데 그 기준이 다른 것이에요. 사람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했지만, 사도바울은 주님의 칭찬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한 분, 주님의 칭찬, 주님의 인정, 그것이면 족했습니다. 17절과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7~18)

 

내 스스로가 기준이 되어서도 아니되고,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적합해서도 아니고, 주께서 정말 나를 인정하시는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랑도 그렇습니다. 왜 자랑하고 싶은가요? 인정받기 위해서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인기 자체를 좋아해서, 인기를 먹는 것을 좋아해요. 사람들의 초점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것에 대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빛나는 스타가 되고 싶은 거죠.

 

세계적인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하바드와 예일 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캐나다의 데이브레이크 라고 하는 한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9년 동안 쉬지 않고 저들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이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과는 동떨어진 세상적인 유혹이라는 해석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인정을 받으며, 주님을 자랑하며, 그러므로 복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내가 많은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 자랑도 하고 싶고, 남편 자랑도 하고 싶고, 사업이 잘되는 것을 자랑하고 싶고, 성취한 것들로 자랑하고 싶고, 건강을 자랑하고 싶고, 물질로 자랑하고 싶어요. 다 하세요. 안 하시면 병나시는 분들도 계시대요^^!

 

그런데 이렇게 자랑하세요. 나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나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세워주십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하시면 안돼요.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은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주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기쁘시게 하고 싶습니다.”

자랑이 끝난 다음 듣는 자의 마음에 어떤 느낌이 남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지 자랑만 하고 있네~!” 이러면 문제에요. 질투심을 유발한다면 빵점! 안하니만 못합니다.

 

그런데 그 자랑을 듣고 나니 ! 정말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구나~! 주님은 사랑이시구나~!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사니 이런 복이 임하는 구나~!”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 찌니라(고후10:17)

그러므로 사람의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시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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