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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24] 사랑이란?
운영자 2023-07-07 추천 1 댓글 0 조회 159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3:1-7 개역개정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을 가리켜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식을 올릴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 또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이란 단어는 원어로 볼 때 아가페입니다. 한국어로 번역이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고자 베푸는 사랑입니다. 그 필요를 채움에 내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실천하는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인 간에 하는 사랑도 사랑, 가족 간에 하는 사랑도 사랑, 친구들끼리 사랑도 사랑으로 표현하고, 엄마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리스 문명에서 형성된 사랑의 속성은 네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첫째로 이성 간에 사랑, 또는 연인 간에 사랑, 이 사랑을 에로스 사랑이라고 합니다. 친구 간에 의리로 또는 우정으로 갖는 사랑은, 필레오 사랑이라고 하고, 부모와 자녀, 자녀와 자녀들 간에 갖는 가족간의 사랑은 스톨게 사랑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가페 사랑, 즉 희생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언급하는 이 사랑은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앞에 열거한 세 가지의 사랑과 아가페 사랑과 다른 점이 있어요. 그 다른 점을 알면,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뜻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아가페 사랑이 아니면, 1) 자신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출발이 자기 자신이에요. 내가 없으면 사랑도 멈춥니다. 내가 손해를 볼 거면 그런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2) 감정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감정에 따라 그 사랑이 바뀝니다. 때로는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약속도 하지만 그런데 그 약속은 좋을 때만 지켜지지, 어떠한 어려움과 불편함이 시작되면, 그래서 감정도 식어지면, 그저 형식적인 관계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3) 평등하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오직 자기 자식에게 뿐이에요. 다른 사람의 자녀를 내 자녀만큼 평등하게 사랑하는 모습이 있나요? 결국 어머니의 사랑도 자기중심적인 또는 본능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사랑하는 이유가 내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거 상대를 목적이 아닌 방편으로 사랑합니다. 애완견을 사랑하는 인간의 심리가 단면을 보여줍니다. 애완견의 감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만족을 취하기 위해서 예뻐해요. 내 허전함을 달래고, 나를 반겨 주기를 바라고, 어쩌다 병에라도 걸려 죽고 나면, 그 자리에 대치될 또 다른 강아지를 삽니다.

5) 이러한 사랑은 진리를 거스릴 때가 많습니다. 숭고하다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에서도 나타납니다. 내 자식이 죄를 범하고 잘못했어도 무조건 내 자식 편이 됩니다. 그래서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가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감추고 거짓 증언하고 결국 진리를 거스립니다.

6) 이러한 사랑은 순간적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부도 이혼하면 남이 되고 형제의 우애도 손해를 본다 생각하면 급속도로 냉각됩니다. 과거에는 안 그랬습니다만은 현대사회에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서로의 만족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존경도 없고, 그처럼 사랑하고 존경스럽던 부모님도 나이가 들고 가진 것이 없으면, 나올 것도 없다 생각하여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너무 슬프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소개하는 이 아가페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은 헌신적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므로 상대가 살고, 모두가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13장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전장인 12장에서,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주신 선물, 즉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13장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낸 이유가 있어요. 모든 은사가 은사다운 모습으로 사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이 아가페 사랑을 Base, 또는 Foundation, 즉 기초로 삼을 때에, 비로소 그 은사가 완성될 수 있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안에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동기가 개인이었습니다. 자신이었어요. 아가페 사랑이 없었어요. 나의 은사가 모든 교우들의 유익을 위하고, 그래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어요. 은사를 받은 자들은 먼저 우월의식을 가졌습니다. 우쭐했어요. 봐라! 나는 남달리 이런 은사가 있다.” 하고 교만했습니다. 교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교만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요. 그러므로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언어에 관한 것입니다. 방언을 합니다. 또는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으로 천상 유수와 같이 막힘이 없이, 또는 달콤한 말로, 재미있는 말로, 또는 감동을 주는 언어를 구사한다고 할지라도, 정말 한 영혼을 위한 사랑이 없다면, 그저 울리는 꽹가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에요. 한 영혼을 바라볼 때 그 지친 심령이 소생함을 얻고, 신앙이 증진되고, 진리로 인해 자유함을 얻어, 주님 앞에 올바른 모습으로 세우고자 하는, 아가페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강단의 설교자는 연사가 되고, 입술의 말은 그저 울리는 꽹가리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설교가 있을 수 있어요. 자신의 지식자랑을 위한 설교가 있어요. 오로지 교회 성장만을 위한 설교가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개인적 야망을 위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은 없어요. 어려운 자를 돌아보고 격려하고, 진리 가운데 다시금 일어서게 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돌아보지 않아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미 없는 것이에요. 한 영혼보다는 한 단체의 목적을 추구하는 이단의 모습들을 연상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심지어는 내 몸을 내어줄지라도, 그 동기가 아가페 사랑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3절에 말씀합니다. 그런 모습이 있어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또는 그렇게 하므로 천국에서 내가 받을 상급이 크니까 내 목숨을 준다라는 동기로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슬람교의 자살 테러집단에 가입한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자폭 테러 수행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기에 그런 일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그 신학적 배경에는 엉뚱한 가르침이 있어요. 이슬람이 자살폭탄 테러를 하는 이유는 천국을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영광은 그렇게 자폭을 하게 되면 천국에서 72명의 아름다운 처녀들이 그를 기다리고 영접한다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몸을 내어주는 이유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죽고 남이 사는 아가페 사랑이 아니라 나는 죽어 영광을 받고 그 일에 너는 죽어주어야만 한다 고 하는 아주 무서운 이기주의가 깔려있어요. 그것은 죄악이에요.

 

4절에는 이 아가페 사랑의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어요. 수동적인 면입니다.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능동적인 모습은 행하는 것인데, 온유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유란 친절을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위해 행하는 실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이란 이처럼 상대방의 필요에, 속도 없이 다 양보하고, 다 받아주고, 다 주고 그래서 손해 보고 결국 망해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를 세우고 진리를 사수해서, 믿음으로, 새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에요. 6절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공의의 사랑입니다. 잘못된 것을 그대로 끌어안아 주시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변화되어 깨끗한 심령으로 바꿔서 안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죄로 인해 죽을 인생을 그래 내가 용서한다그대로 받으신 것이 아니에요. 그 잘못된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전가하시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함 받은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그때 아들을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저는 가끔 아주 독실한 신앙의 부모 아래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못돼먹은 또는 무능력한 아들과 딸이 있음을 볼 때마다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부모님은 저렇게 착하시고 신앙생활도 잘하시고 마음도 좋으신데 왜 자녀들은 저럴까? 한동안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거룩한 엘리 제사장의 집안에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못된 아들들이 있는가?

 

성경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마쳐지기도 전에 그 짐승의 고기를 가져다가 먹었어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7)

 

저는 그 이유를 인생을 한참 살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울 적에 하나님의 공의가 필요합니다. 잘못은 잘못으로 확실히 알게 해주어야 하고,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선을 분명히 그어주어야 합니다.

 

제 아들이 자랄 때 저는 두 번 매를 들었어요. 중학교 시절로 기억합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거짓말을 할 때 저는 엄격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들의 모습을 봅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 그런 모습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 인생에 하늘의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아기라도 원래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훈육이 필요한데 사랑의 훈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서 먼저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아가페 사랑이 깊어질 때, 교회는 든든히 서가며, 가정도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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