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시편42:6-11 개역개정
-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이제는 소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때
9월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서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덕담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9월, 새달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소망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향한 소망이겠습니까? 일상이 회복될 날을 향한 소망입니다. 온전한 예배로 회복될 날을 향한 소망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코로나로부터 일상회복의 모습이 백신접종율이 높은 선진국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덴마크와 영국 그리고 아시아의 싱가폴은 이미 방역체제를 전환하였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체제에서, 이제는 With Corona로 체제로 전환하였어요. 이 얘기는 바이러스와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평소에 그렇지 않습니까? 감기 바이러스도 독감 바이러스도 늘 우리 곁에 있어요.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지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높은 백신접종률 때문입니다. 백신접종률이 70프로를 넘어 80프로 그리고 90프로에 다다르니, 이런 나라는 코로나에 확진 판정은 더 이상 큰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확진이 되고, 그 다음 단계인 발병이 되어도, 이미 맞은 백신의 효과로 인해 심각한 중증으로 발전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기에 이러한 나라는 더 이상 확진검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발병의 단계로 발전했는가? 그래서 중증으로 나타나면 그 때에 치료에 집중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새달을 시작하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기도제목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나라도 9월에는 With Corona를 이루게 하소서! 그러기위해 전 국민의 백신접종이 80프로를 넘게 하소서!
감사한 소식은 군복무를 하고 있는 군인들은 이미 95%가 접종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효과를 관찰 중에 있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훈련하고, 생활하며, 관찰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옵기는 좋은 결과가 나와서, 우리 시민들도 마스크 프리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늘 평안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물은 없고 웃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국에 들어와서 덕담으로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꽃길만 걸으세요.” 정말 우리 인생이 꽃길만 걸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바람을 영어로 wish라고 하는데, 그 뜻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러기를 바라는 희망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아닌 소망이 있으니, 소망은 희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소망은 바라는 바 근거가 있으니, 상황, 환경, 여건을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막연히 바라는 것이라면, 그래서 운이라고 한다면, 소망은 막연한 것이 아니요, 약속된 것을 확신을 갖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광대하시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그 때를, 확신하며,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소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42편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소망이 있습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시편 42편은 성경에 보니 그 제목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어요. 고라 자손은 누구인가하면 다윗시대에 찬송시를 편집하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라 자손이 직접 쓴 시 라기 보다는 다윗의 시를 고라 자손이 편집한 것입니다. ‘마스길’은 히브리어로 그 뜻이 ‘교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교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그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즉 ‘성소’와는 너무 멀리 가 있습니다. 이유는 쫓기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다윗이 예루살렘에 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를 죽이려는 사울왕 때문입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다윗이 성전에서 너무 멀리 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 중에 그 장소가 나타나니, 6절 말씀이에요. 함께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요단 땅과 헤르몬 미살 산” 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땅이니 예루살렘하고는 너무나 떨어져 있는 곳이요, 헤르몬 산은 그 지대가 높아서 만년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많이 추운 곳입니다. 요단강의 발원지가 그곳에 있습니다. 물이 많은 곳이에요. 그러므로 7절에 보니 폭포가 등장을 합니다. 이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그 뜻은 삶이 심히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시편 기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이 많은 곳에서도, 시편 기자는 목마름을 느낍니다. 육신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목마른 것이에요. 그 갈급함을 채우지 못하고 있어요.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 전 13년이란 세월을 유랑합니다. 도망자의 모습으로 살았어요. 이곳, 저곳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적국인 블레셋에까지 갔었어요. 건기 철에 물이 없는 남쪽 지방에는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지는 환경입니다. 그 환경에서 어찌하든지 살아야 하니, 생존을 위해 물을 찾는 사슴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 자신의 처량한 신세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물이 많이 있는 요단과 헐몬산에서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말씀 드린대로,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실 것, 먹을 것, 육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심령이 그의 영혼이 핍절하여 너무 힘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예루살렘 성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 예배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셨던 그 은혜를 받을 수 없으니 그 영혼이 너무나 갈급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과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가 너무나 그리운 것입니다. 성전예배에 나아온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송 부르며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며, 기도하는 중에 얻는 그 기쁨, 그 환희와 영광이 너무 그리운 것이에요. 4절 말씀에서 그 간절함을 또 볼 수 있습니다. 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같은 갈급함이 있지 않습니까? 작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코로나 팬데밐으로 인해, 예전과 같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어요. 예배 후 성도간의 교제도 멈추었어요. 그러기에 누구나 다 그 때를 그리워합니다. 그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좋았는지를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복음의 불모지, 선교지에 가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네팔에서는 때로 출석한 현지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김선생님, 오늘 예배에는 오지 마십시오. 정부요원이 외국인이 오나 검사 나온다고 합니다.” 정부의 감시로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이 세상에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중국이 그랬고, 지금은 북한이 그렇지요. 한 번의 예배가 그렇게 소중하고, 예배 때마다 감동의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이 예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지요. 신앙이 연약한 자들이 그렇지요. 그들은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을 마치 취미 생활하는 것처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니, “이럴 때에는 좀 쉬어도 되지 않느냐?” 그렇게 쉽게 말을 해요.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거에요. 왜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카타콤베, 그 어두운 지하무덤에 모여서 불을 밝히고 예배드리는 일에 생명을 거는지? 그 모습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배가 뭔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가 생명인줄을 모르는 거에요.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습이 10절에 기록된 표현입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오늘 성경본문 3절에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또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배하는 것이에요. 가정에서 몇몇이 앉아 가정예배로 드리는 모습도 귀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 증거하는 강력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예배가 살아나는 것이에요.
과거 여의도광장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예배, ‘민족복음화 대성회’라든지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오셔서 가졌던 ‘74년도 엑스폴로’ 부흥회라든지, 하룻저녁에 136만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한 주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만명의 성가대가 찬송을 드렸으며, 매일 밤 철야기도회가 1만명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렇게 쉽게 말할까요? “예배가 뭐 그리 중요해, 취미생활 아냐?” 오늘날 이 시대의 모습처럼 그렇게 폄하할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두려워하겠지요. 경외감을 갖겠지요. “뭐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아~!” 감히 함부로 폄하하거나 비아냥거리지 못하겠지요.
오늘 시편기자는 그 아름다고 규모가 성대한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 한탄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요즈음 예배당의 자리가 텅빈 모습을 보면서 같은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런 것입니다. 이는 곧 2절의 말씀처럼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최고로 체험하는 곳이 예배의 현장이에요. 거기에는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거룩한 무리가 형제, 자매로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소생함과 회복의 역사가 있는 곳이 예배의 현장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오고 싶어도, 그야말로 목마른 사슴이 그토록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모습의 성도들이 있어요. 어르신들 중에 특히 많이 계시지요. 그런데 나오시지 못하는 이 상황이 이 환경이 너무나 힘든 것이에요.
한 권사님은 전화 중에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맘대로 못해. 자녀들이 보고 있잖어. 그래서 비대면으로 예배 드리는데 양이 차지를 않어. 어서 속히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고 싶어요.”
저는 주일이면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세가 93세세요. 그 먼 곳에서, 분당에서 차를 몇 번 갈아타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시는 모습을 뵐 때마다 감동이 임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오늘 시편 말씀 그대로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더욱 주께 가까이 나와 주님 전에서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샘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듯이 막연한 희망이 아닌 확실한 소망이, 생명수가 그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주님 전에 나온 여러분들이 그러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월이 시작됩니다. 9월은 다시금 소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달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시고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금 도전합니다.
“9월은 예배의 자리에 서십시오. 예배의 성공자가 되십시오.” 노심초사 교회에서 계획하고 추진하는 현장예배에 부름을 받으시면 꼭 나오십시오. 감동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영혼이 소생합니다. 마음을 덮고 있는 근심의 먹장구름은 물러가고 다시금 소망의 빛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치면서,
오늘 시편 42편에 두 번씩이나 똑같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 5절과 11절입니다. 우리가 11절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에 담고, 다시금 소망 중에 일어나 전진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