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새벽강단

  • 예배와 말씀 >
  • 산돌새벽강단
[시편 강해 67] 광야에서 깊어지는 영성
운영자 2021-04-28 추천 0 댓글 0 조회 687
[성경본문] 시편63:1-10 개역개정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광야에서 깊어지는 영성

 

이 새벽 우리가 함께 대하는 시편 63편은 평안할 때에 쓴 시가 아니라 제목에 있는 대로 광야에 처해 있을 때에 쓴 시입니다. 표제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시, 유다광야에 있을 때에]

 

광야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입니다. 물이 부족한 박토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자라지 못하니 열매도 없습니다. 그곳에서 살기로 한다면 겨우 살아가는 것이니, 풍족함은 없고 부족을 느끼며,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밤사이 내리는 이슬은 광야에 풀이 자라게 하고, 양과 염소는 그 짧은 풀을 뜯어 먹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짐승이 제공하는 고기와 우유를 먹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혹독합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 요단강 동편 유다광야에 있었을까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백전백승의 장수였으나 차마 아들과 싸울 수 없어 요압장군에게 전쟁을 맡기고 자신은 피신한 것입니다. 반란군이 언제 자신을 잡으러 들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리 저리 장막을 옮기며 피신해 다녀야 했습니다.

 

1절의 모습은 그 혹독한 광야에서 저녁을 맞이하고 또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다윗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도 이 시편 63편으로 함께 찬송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으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손 들리라

 

이 노래는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슬픔 중에서 고난과 환란 중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는 미소가 아닌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다윗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평안할 때에 부르는 찬송과 고난 중에 있을 때에 부르는 찬송은 당연히 그 느낌이 다릅니다. 가사도 가락과 장단도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의 노래를 주로 부르십니까? 기쁠 때? 슬플 때? 골고루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기쁠 때에 감사의 찬송을 부르시고, 슬플 때에는 소망의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 모습이 곧 이 땅에서 천국을 향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는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제가 기쁨의 노래와 슬픔의 노래를 골고루 부르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는 것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인생이 늘 기쁨으로만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슬픔의 날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가 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제일 먼저 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질병이나 혹은 사고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갑자기 먼저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그러기를 원치 않지만 우리가 먼저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슬픔을 남기고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인생의 날이 슬픔의 연속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쁨의 날이 있습니다. 성장과 성숙은 기쁨입니다. 아가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성장하여 대입에 합격하고, 졸업 후 취업을 하고, 결혼과 출산은 누구에게나 기쁨입니다. 무엇보다 큰 기쁨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의미와 여정을 깨닫고, 심령에는 영원한 천국을 얻어, 천국을 살고,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슬픔 중에 찬송을 부를 때에 삶이 진지해 집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고, 동시에 크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신이 작아 보이니, 교만은 사라지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비로소 귀하게 보입니다.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더 유익한 것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광야 가운데 있는, 이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체휼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가운데 깊은 영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광야학교 출신들입니다. 고난의 때를 통과한 사람들이에요. 온실에서 자라서 집안에 들여 놓은 화분이 아니라, 모진 바람 속에서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린 모습으로 인해 강합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자가 실패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다시금 일어서게 하는 체휼과 격려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모세와 그러했고, 오늘 대하는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이와 같은 선배들의 특징은 광야에서도 소망을 잃지 아니합니다. 슬픔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소망의 줄을 결코 놓은 적이 없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광야에 있는 다윗이 갑자기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 좀 난해합니다. 이 표현은 이러합니다. 내가 비록 지금 광야에 있으나,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주를 사모하는 모습은, 마치 성소에서 주를 사모하며 찬양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환란 중에서도 주를 갈망하고 사모하고 소망하며 찬양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짧게 말하면 환경이, 상황이 나를 어쩌지 못한다. 내 믿음은 변함이 없다.” 이 모습이 바로 광야영성입니다. 일찍이 다윗이 홍안의 소년 때부터, 체득한 것입니다. 곰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로부터 아비의 양들을 지킬 때부터 체득한 영성입니다.

 

흑인 여자 가수인 '로랜드 해이스'가 한번은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군중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고도 침묵을 지키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사명을 이루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몇 년 후 그녀는 베를린에서 노래할 기회가 생겨 무대에 섰는데, 그때 독일 청중들은 그녀에게 흑인 따위의 노래는 듣고 싶지 않다. 돌아가라!”라고 야유를 퍼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녀도 당장 무대를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가 떠올랐다고 했어요. 로렌드 해이스는 그 모욕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군중들의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청중과 자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어느새 소란스럽던 장내도 조용해지고, 청중도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놀란 그녀는 힘을 얻어 노래를 불렀고,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청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광야영성은 이처럼 상황 환경 여건에 굴하지 않는 영성이니 인생의 어두운 밤을 통과해 보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는 진주와 같은 영성입니다. 그 아들의 반란으로 또한 그가 신망하던 책사 아히도벨의 반역으로 유다광야에 피신자로 있는 다윗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저 같으면 그 책사의 반역에 미움과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모를 것 같아요. 그러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면 ~! 인생무상이로구나~! 덧없는 부귀영화요, 권세로구나!”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 상황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지나온 날들 속에 행한 잘못들을 돌이켜 볼 것입니다. 내가 우리아 장수를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넣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젊은 날의 혈기로 인해 함부로 행했던 모습들을 회개할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광야에서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것은 오직 공의로우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깊이, 깊이 깨닫습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세상에 믿던 사람들, 의지하던 권세, 많은 물질도,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윗이 다시금 확인합니다. 우리가 그 앞장 시편 629절과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9.,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결국 의지할 것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공의로우시고 인자하신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윌리스 존슨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재소에서 일을 했었는데 40대에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미국 경제공황의 때였으니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너무도 힘이드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에 부인이 그러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에요.” 그가 부인의 말을 들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되었으니 당시 250불을 빌려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가 지은 건물은 여관이었습니다. 호텔의 규모가 않되고 여관 수준이니 그 이름을 홀리데이 인(Holiday Inn)’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건축이후로 하나님께서 계속 복을 주시게 되니, 계속해서 이 여관은 늘어갔습니다. 이 여관은 호텔의 규모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호텔은 오늘날에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홀리데이 인(Holiday Inn)’호텔입니다. 이름은 Inn, 즉 여관인데 호텔급인 이유가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호텔의 창업주인 윌리스 존슨은 침례교회 집사님이었습니다. 많은 구제 활동으로 사회에 공헌했습니다. 그는 항상 고백하기를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내가 주님을 나의 영역 밖으로 내어 버린다면, 내 사업은 수개월 안에 분명코 무너지고야 말 것으로 믿고 있다.” 고 말하곤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에서 주를 더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숙을 경험하십시오. 어려운 때에, 성령의 감동으로 소망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손을 높이 들어 주실 것입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시편 강해 68]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주는 사람 운영자 2021.04.29 0 645
다음글 [시편 강해 66] 내 대신 악을 보응하시는 심판 주 하나님 운영자 2021.04.27 0 623

08610 서울 금천구 시흥대로75길 20 (시흥동, 산돌중앙교회) 산돌중앙교회 TEL : 02-803-1135 지도보기

Copyright © 산돌중앙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89
  • Total201,650
  • rss
  • facebook
  • facebook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