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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강해 05] 기독교인과 세상정부의 관계
운영자 2020-12-29 추천 0 댓글 0 조회 864
[성경본문] 베드로전서2:11-17 개역개정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기독교인과 세상정부의 관계

 

베드로전서가 쓰이게 된 배경은 베드로전서를 시작할 때에 서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흩어진 나그네, diaspora라고 말씀드렸어요. 특별히 소아시아 지방에 정착을 하고 살아가는 중에 황제를 숭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게 된 신앙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의 내용은 위로와 격려가 담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베드로전서를 '격려의 서신', 또는 '소망의 서신'이라 부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지킨다고 하여, 국가적으로 정부의 주도로, 환란과 핍박이 가해 올 때에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과 정부와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인의 자유에 보장을 두고 시작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헌법으로 국민 개인에게 정신적 자유권이 보장되어 있어요. 그 중에 두 번째가 종교의 자유입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신앙, 개종, 종교선택, 종교적 행사의 자유, 종교적 집회 및 결사, 포교 및 종교교육의 자유 등과 한 특정종교의 국교화 금지 및 정교분리의 원칙을 보장한다.” 이 모습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시대에는 그러지 아니했어요. 황제 마음대로였으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칙령이 하달되면서부터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핍박을 당하지 않으려면 국가의 명령대로 따르며 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지 아니했어요. 불같은 시련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 당했습니다.

 

오늘날 저 북한은 자신들의 공산주의 이념을 지키고 공산당 1당 중심의 정치를 이어가기 위해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아주 적대적입니다. 비밀리에 신앙생활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30만 명 중에 현재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5-8만 명이라고 국제전문기관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남한에 있다고 하는 것이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비밀리에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자유의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북한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어요. 이들이 당시에 로마제국의 정치인들입니다. 네로황제나 도미티안 황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렇게 나라의 왕이 나서서 신앙인을 폄하하고 누명을 씌워 박해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영화주제곡인 넬라 환타지아로도 잘 알려진 영화 인 미션이라는 영화에서 이러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750년대 남아메리카 정글 속, 과라니족 원주민 마을에 생명을 무릅쓰고 선교를 하던 가브리엘 신부는 마침내 교회를 세우고 평화로운 마을로 세워갑니다. 그런데 이 과라니족 마을이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원주민들은 노예로 잡혀가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요. 이때에 그 곳에 함께 선교사역을 돕는 멘도자라는 인물은 무력으로라도 원주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과거 원주민들을 노예로 잡아서 본국으로 후송했던 인물이었는데 철저하게 회심을 하고 죄를 씻기 위해 그 마을에 들어와서 신부를 도와 선교사역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신부는 비폭력의 원칙을 고수합니다.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결국 전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핍박의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라 라고 말씀합니다. 대적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하라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12절에 말씀입니다. 너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 모습은 실제 역사에 나타났으니 로마시대 박해와 핍박 속에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박해하면서 기독교를 굴복시키려고 하였으나 기독교는 고분고분 정치권력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로마에 저항하면서도, 바른 윤리와 정신과 신앙을 가르치는 기독교는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 아래에서 착취를 당하던 농민들, 나그네들, 약자들 사이에서 더욱 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의 일부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터툴리안(160-220)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문학, 철학, 법률에 능통한 자였어요. 박해를 당하면서도 영웅적으로 순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했고, 마침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후일 명망 높은 신학자요, 교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신앙에 따라 순수성, 도덕성, 거룩성을 지켜가는 것은 로마의 정치에 우선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박해 속에서 대항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15절에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이 말씀의 뜻은 믿음의 사람들이 행하는 신앙의 행위에 대해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심오하고 깊은 신앙의 세계와 영생의 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할 때에 말 보다는 선한행위의 실천으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가 볼 수 있으니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대제사장이 보낸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아 가려 할 때에 베드로가 분개하여 칼을 뽑아 한 병사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그때에 떨어진 귀를 집어 들어 다시금 그 병사의 귀에 붙여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예수님은 그들이 행하는 십자가 형이라는 잘못된 모습에 반항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십자가 상에서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그와 같은 사랑 많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로마병사 중에 책임자격인 백부장이 감동에 젖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해요. 사람이 바뀌는 것은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가능케 합니다. 권력아래에서 사람들은 맹종합니다. 그 힘이 두려운 것이에요. 그러나 그 권력이, 무력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참 인간성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하의 권세를 잡고 있었던 로마가 못하고 나찌독일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네팔에서는 1998년부터 10년간의 내전이 있었습니다. 왕정을 지키려고 하는 군대와 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서민들이 해방을 가져야 한다 라는 강한 의지를 가진 소위 마오이스트라고 하는 공산당이 게릴라가 출현한 것이었습니다. 서로 간에 전쟁으로 약 만 오천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연일 신문에는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고 남편을 잃고 오열하는 아내의 모습이 실렸습니다. 병원에는 총상으로 인해 죽어가는 환자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피가 절대적으로 모자랐습니다. 사람은 죽어가고 수술을 위해 피가 필요한데 구할 길이 없어 부상자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네팔에서 소외당하고 있었던 소수 종교집단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보기에는 서양종교를 믿는 이사이들 즉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박해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그저 밟으면 밟히고 죽이면 죽임을 당하는 힘이 없는 천민들의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저들이 이 부족한 피를 공급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헌혈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매 부활절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헌혈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가던 부상병들이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이 모습을 보는 네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내전 기간 동안 기독교는 가파르게 성장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자발적인 마음과 행동의 변화는 사랑의 실천과 감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말씀이에요. 그러나 인간의 내면의 죄성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은 성령의 역사 속에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과거에 이와 같은 큰 핍박과 박해의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정부의 지침에 협력하며 순종합니다. 그렇게 해야 질서가 섭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주를 위하여 하는 것임을 늘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내용에 대하여 1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시는 말씀의 적용입니다.

 

그런데 국가와 정부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위정자들은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되니, 14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왕과 총독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정부에게 권세를 주셨는가? 말씀에 있는 대로,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주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않됩니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와 공동체를 축복하시는 것이니 정부는 정부대로 시민은 시민대로의 책임과 의무와 권리와 자유를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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