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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강해 04] 우리도 산돌(Living Stone)이 되려면
운영자 2020-12-24 추천 0 댓글 0 조회 1265
[성경본문] 베드로전서2:4-10 개역개정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우리도 산돌(Living Stone)이 되려면

 

우리가 성경을 읽게 되면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 반석으로, 보호하시는 날개, 또는 창과 방패로 불렀습니다. 그 은유적인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어린양으로, 참 포도나무, 생명수, , 진리, 말씀으로, 생명으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이름들 속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성품이 담겨져 있어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예수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바로 산돌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Living Stone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죠. , 바로 우리 교회의 이름이 산돌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그 이름이 알려진 데이비드 리빙스톤, 그의 가문의 성이(Last name) 리빙스톤입니다.

 

여러분, ! 그러면 어떠한 그림이 그려집니까? 그 느낌은 어떻습니까? 단단하다. 거칠다. 무겁다. 그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단단하다 의 반대는 부드럽다. 거칠다의 반대말은 매끄럽다. 무겁다의 반대말은 가볍다 가 되겠지요.

 

이 돌과 연관하여 성경에 나타난 단어들은 기초석(고전 3:11), 신령한 반석(고전 10:4), 모퉁이의 머릿돌(21:42), 뜨인 돌(2:34)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에서 뜨인 돌이란 Flying Stone 즉 공중에 나는 돌로서, 날아가서 강하게 부딪혀 불의를 깨뜨리는 심판의 돌로 표현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돌은 예수님을 상징하는데 그 모습이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의미로, 배척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모습은 버린 돌로 표현이 됩니다. 버려진 돌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무시당하고 버린바가 되었어요.

 

오늘 성경본문 7절과 8절에서 묘사한대로 건축자들에게 쓸 데 없어 버린 돌이 되었고 그러므로 사람들의 발에 부딪히고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쓸모가 없고 가치가 없는 모습처럼 되었다는 것이에요.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실패자요,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도 아주 상 죄인이에요. 온 몸은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머리에는 날카로운 가시나무 관을 쓰므로 이마에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정말 처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고 그의 몸 안에 흐르던 피는 못이 박힌 곳으로부터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엘리 엘리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포효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에, 우리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그는 그렇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 이후에 그의 변화된 신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 모습은 이제 긍정적입니다. 영광이요, 빛입니다. 죄인이셨던 그가 그렇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이후에, 죽음을 물리치시고 일어나셔서, 생명의 주로 부활하셔서, 영광의 주가 되십니다.

 

오늘 성경 본문 4절이 이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가....”

 

더 이상 버려진 돌이 아니었습니다. 보배로운 산돌! 즉 값을 더 이상 매길 수 없는 보석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보석 아시지요?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능력과 아름다움이 가득하신 보배로운 산돌 즉 보석이 되셨습니다. 아멘!

 

송명희 씨가 쓴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그 이름 이란 시에요. 그리고 최덕신 집사님이 곡을 부쳤는데 거기에 가사가 이렇습니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그런데 성도 여러분! 멧세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은 친히 머릿돌이 되시고 모퉁이 돌이 되셔서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는 것이에요. 그가 커다란 집,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정초가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큰 집을 건축해가시기 위해서, 그 영광의 큰 나라를 세워 가시기 위해서, 우리들을 부르신다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나 같은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거에요. 연약하고 부족하고 힘이 없는 나와 여러분을 부르셔서,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에, 주께서 친히 주님이 되시고, 그 마음에 좌정하시므로 우리를 산돌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해 나가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는 것이에요. 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구원해주심으로 우리의 과거의 죄인의 정체성이 바뀌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쓸모없는 인생이 쓸모 있는 인생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에요. 택하신 족속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됩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로 나아와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산돌이신 예수님을 따라 산돌이 되려면, 때때로 세상에서 버린바 된 경험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따돌림을 당해본적이 있습니까? 버린 바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너무 고지식해서.... 세상 사람들은 버젓이 행하는 관행들, 그러나 신앙인이 되고 보니 그건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야! 나는 할 수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아니요!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하여 외면당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라고, 차별당하고, 버린바가 되고, 외로움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버려진 바가 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하는 아픔과 어려움이 있어요. 세상의 풍조는 쑤나미처럼 밀려옵니다. 거부하기가 어려운 이 세상의 풍조가 있어요. 맘몬주의, 이기주의, 편리지향주의, 인본주의, 다원주의....., 그러나 성경적이지 않은데 휩쓸려갑니다. 그래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면, 따라가지 않고 버티고자 하면...., 외톨이가 됩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옳은 길이라면 버티고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신앙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네팔에서 사역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국에서 보내온 리빙스톤 학교를 위해 네팔로 보내온 컴퓨터 네 대를 찾을 때에 세금이 한 대당 100만원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400만원이에요. 중고를 새것 가격으로 계산한 거였어요. 왜냐하면 네팔은 중고를 들여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중고가격의 세금계산법은 없으니 새것으로 가정하고 한대 가격으로 100프로 세금내고 찾아가라. 필리핀에 있을 때에는 중고도 들여와요. 그래서 한국에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버스들이 거리에 보였어요. 버스에 한글로 쓴 글자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으니 미아리, 삼양동, 구파팔, 가리봉동...., 그 글짜 보면서 재미있어 했어요.! 그런데 네팔은 아니에요. 히말라야는 세계에서 보호하는 청정지역이에요. 중고는 안 받아줘요. 이것을 모르고 한국의 한 교회가 단체로 들어오는 길에, 개인이 들고 들어와야 한다고, 제가 신신당부했는데, 공항에서 무게가 나가니, Over Charge 물지 않으려고, 항공화물로 보내고 들어온 거에요.

 

어떻게 세금가격이 다운이 안 될까?” 다음 날, 세무공무원과 저 사이에 브로커가 붙었어요. 학교 교육용 물건이니까....!” 자기에게 150만원만 주면 해결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구미가 당기지 않나요? 제가 한인교회 다니는 교민들에게 문의하니, 어느 한 선교사님이 조용히 저에게 다가와서는 하는 말이, 나도 경험을 했는데..., 그거 쉽지 않아요. 이 나라가 후진국이라 원래 다 그래요. 적당히 먹이고 빼 내세요..... 아니면, 컴퓨터 한 대를 세무 공무원에게 주세요.”

 

그러나 이게 정도인가? 선교사로써, 교육인으로써, 기독교 교사들과 학생들 앞에서 이 모습이 떳떳한 일인가? 예수 안 믿으면 모를까, 믿는 사람이니 고민이 깊어집니다. 지방 교육청으로부터 탄원서를 써서....., 뭐 수도 없이, 대사관, 외무부, 환경청, 지방 교육청, 이 기관 저 기관, 사람들의 싸인을 거쳐 마침내 4개월 만에 찾아내게 되었는데 세금이 150, 그러니 17만원 드려서 찾아낼 수 있었어요.

 

비슷한 일이 초급대학 설립 인가를 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렇게 애타게 2년을 기다려 최종적 단계에 이르렀는데 최종적으로 싸인해 주는 교육부의 공무원이 노골적으로 돈 가져오라는 거에요. 영수증 없는 돈이죠. 뇌물 아니겠습니까? 설립 허가받는 학교마다 약 250만원 정도를, in my pocket 하는 거에요. 2년이나 기다려 왔는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스럽지 않습니까? 교사들이 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함께 기도해 왔는데...., 결국 세상 사람들처럼 뒤로 돈 먹이고 설립허가 받아냈다. 이게 기독교 학교로써 또한 선교자의 자세로 맞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참 멋지신 분이세요. 나중에 되어져 가는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이 검찰에 잡혀 들어갔어요. 여기 저기 뇌물을 너무 많이 받고, 결정적인 사건은 수능시험같은 시험의 시험지를 인도에서 인쇄해서 드려오는데 거기에서 이윤을 착복한 것이 발각되어 구속되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 공무원에 의해 마침내 설립허가를 받게 되었어요.

 

성도 여러분! 제가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해 배운 교훈이 큽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사람의 눈보다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KORAM DEO 신앙이라고 그럽니다. 그 뜻이 주님 면전에서!” 그런 뜻이에요. “주님 면전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 설혹 손해를 보더라도, 외톨이가 되고, 눈총을 받는 다 해도, 시간이 더디 걸린다 해도, 정도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버려진 돌이 되고 거친돌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똑바로 행할 때에, 그 모습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에 5절의 말씀처럼 우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9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도 기도합니다.

주여!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산돌이 되게 하옵소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서게 하옵소서! 때때로 외톨이가 되고 거친 돌이 되어도 주님 기뻐하시면 그 길을 걷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좁은 길을 걷더라고 하늘 찬송을 부르며 주와 함께 걷게 하옵소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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